故 김준엽 총장님을 기억하며

故 김준엽 총장의 서거 10주년을 맞아 그의 삶 속에서 발견한 자유, 진리, 정의의 단면을 소개한다. 군인으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에 대한 그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The HOANS에서 짚어봤다.

 

10년 전, ‘고려대학교의 큰 스승’이란 수식이 따랐던 故 김준엽 본교 9대 총장이 눈을 감았다. 광복군으로서, 학자로서, 스승으로서, 고려대학교 총장으로서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지켜와 수많은 존경을 받은 그인 만큼 김 총장 타계 10주기를 맞아 고인의 생애와 업적을 돌아보는 기사를 준비했다.

김 총장의 삶은 한국사의 격동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를 관통해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학병으로 징집됐으나 광복군에 합류하겠다는 의지로 탈출해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6,000리 장정을 성공했다. 광복 이후에는 중국에 남아 못다 이룬 학문을 계속했다. 중국사를 전공으로 했던 만큼 중국에 남아 전문가가 되겠다는 학문에 대한 의지가 보인 김 총장다운 선택이었다.

1949년 귀국한 이후 본교 사학과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김 총장은 고려대학교에서의 장정을 시작했다. 정계의 부름이 있었음에도 학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그는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후학 양성과 본교의 발전에 힘썼다. 이후 본교의 총장으로 재임하며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군부독재에 맞서 학문의 자유를 외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광복군에서 총장까지 흔들림 없던 그의 굳건한 지조를 다시 한번 기억해본다.

 

자유 독립을 위한 헌신

 

평안도에서 태어난 김 총장은 어릴 적부터 독립군의 투쟁을 보며 항일의식을 키웠다. 일본 게이오 대학 동양사학과에 진학한 후에도 광복을 향한 그의 목적의식은 뚜렷했다. 그는 학병 징집 소식을 듣자마자 입대 후 중국 전선으로 탈출해 독립군 임시정부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본군이 허용한 호신용 부적에 탈출에 필요한 물품을 담는 꾀를 내어 전략적으로 탈출을 준비했다. 그 결과 중국 전선 일본군 경비 중대에 배치된 후 탈출해 우여곡절 끝에 중국 대륙을 종단할 수 있었다. 10개월 만에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해 독립을 이루기 위한 그의 일차적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김 총장은 임시정부에서 이범석 장군을 만나 시안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미군과 함께 미국 전략 정보기관(OSS)의 한반도 진공 계획에 따른 게릴라 훈련을 받으며 본격적인 광복을 위한 진공 작전 준비에 돌입했다. 3개월의 훈련을 마친 그는 출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밝히며 작전 개시는 없었던 일이 됐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회상하며 기쁜 마음보다는 허탈하다는 소회를 밝혔다. 태평양 전쟁에 있어 한국의 노력이 조명되지 않아 장차 국제적인 발언권이 박약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20대 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소 전장에 뛰어들었던 김 총장의 삶의 단면에서 ‘자유’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회고한 대로 학병 탈출과 독립군 투쟁 결정은 소신대로 움직인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 아니고서는 내리기 어려운 중대한 결단이었다. 독립을 위해 내린 선택은 또 다른 진로를 위한 토대가 돼 김 총장의 다음 발걸음을 결정했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내건 김 총장은 광복 이후 경제 문화 사회 군사에 걸친 제반 건설 사업에 기여하는 국민이 되기로 결심한다. 특히 대학 시절의 전공과목과 전쟁터에서 터득한 중국어 능력을 살려 중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해 중국 전문가가 될 것을 다짐했다. 해방 이후 김구 주석을 따라 독립 국가 건설에 힘을 합칠 것인지, 혹은 중국에 남아 동양사 공부에 매진할 것인지 기로에 놓인 때에도 그는 소신에 따라 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의 장정

 

시대의 스승이라는 칭호에서 드러나듯 김 총장은 본교에 학자로서의 발자국도 짙게 남겼다. 그는 광복 이후 1949년 본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학문 연구를 이어갔다. 이후 36년간 본교에 몸담으며 중국사를 강의했고 ‘중국최근세사’, ‘중국공산당사’ 등 저서를 저술하는 등 중국 연구에 전념했다. 중국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이어져 1957년 국내 최초 대학부설연구소인 본교 아세아문제연구원을 설립하는 배경이 됐다. 김 총장은 이곳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미국 정보기관을 비롯해 외국으로부터 활발한 모금 활동을 펼쳤고, 이를 기반으로 중국과 공산주의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분단이라는 또 다른 한국 역사의 급변기에 김 총장은 학자의 본분을 지켰다. 중국과 공산권에 대한 인식이 국내에서 그리 좋지 못한 상황임에도 이를 공부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이유는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를 알아야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공산권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에 맞는 연구 업적을 이뤄 선구적 역할을 했다.

김 총장은 한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국의 중국학 연구 수준 향상과 한중 학술문화 교류 증진을 위해 본교 부설 중국학연구소를 조직했다. 이에 더해 베이징대와 산둥대를 비롯한 중국 내 10여 개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세워 양국의 관계 및 학술교류에 힘을 쏟았다. 그의 이런 행보는 중국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김 총장은 2000년 중국 정부가 건국 50주년을 기념해 제정한 문화훈장인 중국어언문화우의장을 수상해 중국 정부로부터 한국인이 훈장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됐다. 중국 전문가가 되겠다는 그의 결심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김 총장은 정권에 상관없이 학자로서 자신의 소신을 관철했다. 1982년 김상협 전 총장의 뒤를 이어 본교 총장이 되기 전까지 그를 향한 정계의 부름은 꾸준히 이어졌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를 시작으로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 5‧16 군사정변 이후 김종필 당시 총리의 공화당 사무총장 제의 등 그의 고위공직 진출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통일원 장관 자리를 제의했지만, 김 전 총장은 끝내 학자로 남기를 선택했다. 또한 그는 박정희 정권이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부분을 삭제하고 ‘5‧16 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라는 문구를 추가한 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김 총장은 1987년 2월 26일 삼일절 기념 학술대회 기조연설에서 “5‧16 후 헌법 전문에서 임시정부 언급을 삭제한 것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정한 것이니, 새 헌법 전문에 건국 정신과 그 통치 권원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총장은 학자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아는 것을 곧게 행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의 진면모를 보여줬다. 학문적 시류에 구애받지 않고 통일에 도움이 되는 공산권 연구를 진행했으며 여러 차례 정계의 제의를 거절하며 외길을 걸었다. 학자라는 지위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이의 구별된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권에 맞서 학생들을 지킨 정의의 스승

 

본분에 대한 김 총장의 곧은 지조는 본교 총장 재임 시기 스승으로서 살았던 삶의 단면에서도 나타난다. 김 총장은 본교 부임 후 33년 만에 제9대 총장으로 선임됐다. 총장직을 수행하면서도 정부에 굴종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며 학원 자율화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전두환 정권 아래 수행돼 온 불문율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 그 일환이다. 취임 당시 정부에서 파견돼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을 감시하던 속칭 ‘기관원’들을 모두 내쫓았다.

전두환 정권 아래 외국 정부나 기업의 귀빈이 방한할 경우 대학 측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하는 불문율이 있었으나 이 역시 거부했다. 그는 외교의 한 방편으로 학위를 수여할 수 있으나 이를 남발할 수 없다며 취임 후 3개월 동안 세 번이나 정부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 요구를 거절했다. 김 총장은 독재 치하에서도 진리 탐구에는 무제한적인 비판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학문의 자유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김 총장은 정부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의 편에 서며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 또한 수행했다. 1984년 11월 본교 학생을 포함한 대학생 264명이 총학생회 인정과 교육부 장관 문책 등 14개 조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당사에 진입해 농성을 벌였다. 이에 대응해 교육부는 사건에 연루된 학생회 간부들을 총장 직권으로 제적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 전 총장은 크게 분개해 총장은 뜻대로 학생들을 제적할 권한이 없으며 자신은 학칙에 따른 절차만을 따르겠다고 반발했다.

학생들이 구제되자 군사 정권의 화살은 김 총장을 향했다. 교육부는 당시 대학에서 관행으로 이뤄진 교직원 자녀의 특례 입학을 문제 삼으며 김 총장에게 특례로 입학한 학생들의 제적 혹은 자신의 사퇴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숙고 끝에 사표 제출을 결정하며 2년 8개월 만에 본교를 떠나게 됐다. 그러나 학생들은 김 총장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가 총장으로서 참여하는 마지막 행사였던 1985년 2월의 졸업식은 거대한 학생 시위의 장이 됐다. 졸업식 당일 본교 학생들은 ▲학원 자율화 침탈 중지 ▲사학에의 관권개입 중지 ▲총장사태 결사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푯말을 든 채 대대적인 항의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는 이날을 회상하며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는 많았어도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나밖에 없었다”며 이날의 경험을 가장 자랑스러운 일로 꼽았다.

총장 사퇴 이후 김 총장은 평교수로 남기를 선택했다. 사퇴 이후에도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그에게 입각을 제의했으나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1988년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 총장에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고,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감옥에 있는 이상 정부에서 일할 수 없다며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이후에도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제2 건국추진위원장 제의를 거절하는 등 총 12차례에 걸친 관직 제의를 모두 거절하며 학자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는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고록 <장정>을 집필해 출간했고, 1988년 사회과학원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재임하는 등 연구에 몰두했다. 김 총장은 2011년 6월 7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총장으로서 비굴한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던 그는 일관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며 ‘정의’를 수호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다는 결의는 그가 취임사에서 언급한 신성불가침의 교권을 외압에도 불구하고 현실화했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총장 재임 전 본교 총장의 조건을 구상해 내적 원칙을 수립했다. 포부와 행동을 일치시켰던 그에 모습에 감복한 학생들은 그가 내세우지 않았던 총장으로서의 권위를 항의 시위를 통해 일으켰다. 2년 8개월의 재임 기간은 그의 열망을 모두 담기에는 짧았지만 본교의 초석을 다지는 데 온전히 기여했다.

 

스승이 남긴 발자취

 

故 김준엽 총장이 남긴 발자취는 본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총장 재임 시절 본교는 김 총장의 주도 아래 많은 발전을 거듭했다. 당시 본교는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으며 교우회와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그는 재정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교우회를 방문하며 교우들의 도움을 청했다. 이러한 노력을 토대로 본교는 외형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김 총장은 당시 본교에 세워진 건물의 총면적인 4만 8,000평의 절반에 해당하는 2만 3,000여 평에 ▲과학도서관 ▲법학관 ▲정경관 등 새로운 건물을 구축했다. 녹지캠퍼스를 조성하고 이곳에 의료원을 이전하는 계획을 수립해 산하에 ▲혜화병원 ▲구로병원 ▲여주병원 ▲반월병원을 두기도 했다.

김 총장은 행정 개혁에 앞장서기도 했다. 기존에 ▲사무처 ▲교무처 ▲학생처로 구분된 3개의 부서가 모든 행정 업무를 관장했으나, 사무처를 ▲기획처 ▲총무처 ▲관리처로 더욱 세분화했다. 기획처가 예산 및 감사 업무를, 총무처가 재정과 인사 업무를, 관리처가 건축과 시설 관리 업무를 담당하며 행정 조직 체제가 이전보다 더욱 현대식으로 개편됐다. 이외에도 400명 선이던 전임 교수를 600명 선으로 늘리는 등 교육의 내실화를 도우며 본교 중흥의 전기를 마련한 총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 총장은 외국어 교육의 발전과 과학 고대 기치를 내걸어 본교의 국제화를 꾀하기도 했다. 이는 중국 생활 시기의 경험을 통해 어학의 중요성을 체감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의지였다. 본교에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가 신설된 것이 대표적이다.

 

故 김준엽 총장님을 기억하는 우리

 

위협이나 외압에도 광복군으로서의 삶, 학자로서의 삶, 스승으로서의 삶의 본분을 지켰던 故 김준엽 총장의 삶에서 본교가 핵심 가치로 삼는 자유, 진리, 정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일본군으로부터 생명을 건 탈출을 감행하면서 독립 의지를 굳건히 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학자로서 통일에 도움이 되는 공산권 연구를 진행했다. 스승으로서는 국가 주요 보직을 고사하고 학생에 편에 서서 혼란한 정세 속에서 학생들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보호했다.

그의 삶의 가치를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김 총장이 소장으로 역임했던 본교 아세아문제연구원에서는 2012년 김준엽 렉처 시리즈를 개최했다. 중국 전문가였던 그의 업적을 기리며▲한국학 ▲중국학 ▲한반도 통일 ▲동아시아 지역 문제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저명한 학자를 초청해 강연을 진행했다. 또한 사회과학원과 공동으로 김준엽 서거 1주년 기념 국제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렉처 시리즈는 본교 유튜브 계정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본교 박물관 백년사전시실에서는 시청각 자료로 당시 상황을 체감해볼 수도 있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故 김준엽 총장의 좌우명 중 하나다. 김 총장은 어떤 상황에서든 역사의 신을 믿었다. 현재가 그의 편이 아닐지라도 역사가 기록하는 진리는 다를 것이라 확신했다. 참된 스승으로 불린 이들 중 다수가 삶의 후반부에서 그들이 확언한 바와 다른 태도를 보여 신뢰를 무너뜨린 것과 달리, 김 총장의 삶은 처음과 끝이 하나의 신념으로 연장선에 있다. 현실에 사는 것을 넘어 역사에 살아야 한다는 故 김준엽 총장의 신념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참 지식인, 참 스승은 어떤 모습일지 그려본다.

이채윤·김동현·김준범 기자                                                                                    dlcodbs00@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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