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시간의 무색함에 대하여

얼마 전 생각 난 자료를 찾기 위해 오랜만에 외장 하드를 꺼냈다. 대학생이 된 후로 사용하지 않아 고등학교 3년의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하드 디스크. 기억에 먼지가 쌓인 폴더를 찬찬히 들여다 봤다.

폴더명을 볼 때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 그렇게 시작한 추억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여운을 남겼다. 뭐 그리 할 일이 많았는지 학년별 폴더마다 더 빼곡하게 폴더들이 들어차 있다. 고생한 나 자신을 동정하며 파일을 뒤적이다 보면 딴짓의 증거, 오락의 증거도 수두룩해 감동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뭐든 즐겁다.

지금보다 성실하고 ‘똑똑하기까지’ 한 고등학생의 나인 줄 알았는데 웬걸. 발표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보는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오락가락한 폰트로 정신없게 구성된 화면인 데다 내용도 부실하기 그지없다. 이 발표를 준비한다고 며칠 밤을 새워 고민한 날들이 떠오르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열심히 적은 소논문에선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기 위해 애쓴 흔적이 가득. 지금의 내가 아주 뛰어나다곤 할 수 없지만, 당시의 내게 멘토는 되어줄 수 있을 듯하다.

그 시절에 한 건 공부뿐이 없으니 배운 내용을 추억하는 수준에 그칠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곳곳에 그 시절의 내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수행평가를 위해 적었던 감상문에도, 보고서에도, 발표 자료에도 내가 있다. 빼곡한 글자와 들쭉날쭉한 이미지 너머로 그때의 내 생각이 엿보였다. 가부장제와 가정폭력 문제를 비판한 사회문화 발표. 독서 시간에 발표한 외모지상주의를 풍자한 소설에 대한 고찰. 의복 문화에 담긴 차별적 구조와 폭력을 비판한 방과 후 발표. 여성주의를 비꼰 인터넷 밈에 화가 나 적은 4쪽에 달하는 에세이. 한결같음에 웃음이 났다.

내친김에 사진을 모아둔 드라이브도 탐방했다. 아득한 마음 씀의 자취엔 잊었거나 잊고 싶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 사이엔 화려한 무대 위 인물들과 그에 못지않게 반짝이려 애쓴 표시들, 그리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민과 분노의 흔적. 무지한 줄 알았던 날들에도 무언가를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해 그에 골몰해 있었다.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평할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때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엄청나게 실망하리란 것이었다. 지금과는 관심사도 달랐고 매사를 대하는 태도도 달랐던 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꺼내 든 과거의 시간은 그런 나를 비웃듯 한결같은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어떤 면에선 심지어 조금 성숙해진 내가, 다만 몇백 일 잠을 조금 덜 잤을 뿐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편적인 순간과 순간, 찰나의 모습과 행동은 상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점 혹은 서로 다른 길이와 두께의 선분에 불과했다. 그 모든 날이 이어져 지금의 내게 닿아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자탄한 지난날에도 실은 알고 있었을 테다. 나는 어디로도 가거나 사라진 적 없다. 다만 돌고 돌아 지금은 이 자리에 도착했을 뿐이다.

어제의 나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말이 퍽 잔인하다는 누군가의 말에 공감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어제의 나를 돌아본 결과, 그 말이 권위적인 발언이기보다 성찰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순간엔 지나온 날의 나보다 더 못난 모습일지 모른다. 다만 그 실패와 추락마저도 켜켜이 쌓여 오늘의 내일의 내가 디딜 발판이 된다.

당연하고도 부끄러운 사실. 묵직하게 마음을 찔러오는 그 발견에 스물하고도 몇 년을 더 산 나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문자화하는 순간 이 복잡한 감정을 단정 지을 것이 두렵다. 하지만 이 감정이 무안이든 위안이든 상관없다. 그저 이 모습과 순간이 이어져 도달할 내일의 내가 궁금할 뿐이다. 부디 적당히 한심하고 성장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기를.

 

학부생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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