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광장] 괜찮은 위로

주위에 예상치 못한 일로 괴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재나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 등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고통이 있음을 타인을 통해 지레짐작하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이들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위로의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위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어설픈 위로가 당사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받았던 위로를 생각했다. 진심으로 다가왔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위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위로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누구나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똑같이 실연을 겪었더라도 아름다운 이별과 그렇지 않은 수많은 이별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공감은 경청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떠한 상황에 놓였고,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될 것이다. 경청에서 시작된 위로는 곧이어 공감으로 이어진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듣게 되면 그 상황에서 슬픔을 겪었을 상대방을 떠올리게 된다. 자연스레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지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의 경험을 빗대어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고통이 상대방의 책임이 아님을 알려주면 좋은 위로가 될 수 있다. 물론 받은 상처의 출발점이 자신인 경우도 있겠지만 주위의 여러 경우를 접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특히나 상처에 무뎌진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상처를 당연시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상황의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곤 한다. ‘내가 더 잘했더라면,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과 같이 말이다. 감정이 격해질수록 자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다 본인의 탓일 수는 없다. 어쩌면 운이 나빴던 것일 수도 혹은 타인의 잘못이 컸을 수도 있다. 약간은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자책하고 있는 사람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큰 위로가 된다.

권진아의 <위로>라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위로하려 하지 않는 그대 모습이 나에게 큰 위로였다’

곱씹어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따스한 위로를 기대하지만, 위로를 받게 되면 불행한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 같다. 이중적인 감정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위로받길 원하고 있다면 큰 용기를 낸 것이다. 위로를 받기까지는 겪은 불행을 상대에게 말해야 하고 다시 한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가사가 다가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위로를 받았으나 겪은 불행을 강조하지 않아 위로라고 느껴지지 않게 하는 위로. 말장난같이 보일 수 있는 이 가사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위로를 주는 사람은 위로를 받는 상대가 그 불행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는 점을 배려할 필요가 있다.

주위에 위로받을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힘듦을 알리지 않으면 어떻게 알고 위로를 하나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위로가 시작되지 않을까. 이들이 가장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자 위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위로는 어렵다. 좋지 않은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어디서 배워오는 건가 싶지만, 누군가 나타나서 위로의 방법이랍시고 알려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위로해야 할 때는 뜻하지 않더라도 다시 돌아온다. 그동안의 위로가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기를 또 앞으로의 위로가 상대에게 괜찮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쳐보려 한다.

 

김하현 기자
dop3568@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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