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광장] 누구도 ‘누구’가 아니다

“내일이 올 걸 아는데 난 핸드폰을 놓지 못해” 가수 딘(DEAN)의 노래 ‘Instagram’을 시작하는 가사다. 인스타그램은 사진 업로드를 기본으로 짧은 글을 함께 올리는 SNS다. 사진을 게시하는 기본 기능과 더불어 최근에는 스냅챗에서 출발한 ‘스토리’ 기능이 인기를 끈다. 스토리에 공유한 영상이나 사진은 게시 24시간 후에 사라진다. 이런 특성으로 SNS 업로드의 부담이 줄면서 생활 일부를 찍어 올리기가 훨씬 쉬워졌다.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공유하는 행위가 일상화된 것이다. 개인적 생활의 일부가 손쉽게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공간에 놓인다. 누구나 일상을 쉽게 올리게 된 상황을 ‘투명사회’의 한 면으로 볼 수도 있겠다. 아주 사소한 일상의 순간부터 개인의 취향에 이르는 영역까지 가감 없이 스토리와 게시물로 공개되는 피드는 개인에게 투명성을 요구하기까지 하는 듯 보인다. 인스타그램 안에서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자는, SNS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알아가자는 요구. 모두가 가장 중요한 진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한병철이 말했듯,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망각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나? ‘셀카 찍는 걸 어지간히 좋아해. 시험 기간에도 공부하는 모습 틈날 때마다 올리네.’ ‘이 영화감독 말이 많던데, 감동했다니… 좀 그러네.’ 아무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 새 인스타그램 속 사진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냥 내 핸드폰을 보고 나 혼자 하는 생각일 뿐이기에, 평가하는 데 별다른 거리낌은 없다. 그러면서 우리는 ‘누구’가 된다. ‘누구’라도 되는 양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저 친구는 어떻고, 이 친구는 어떻다’ 하는 나름의 프로파일링 작업이다. 어차피 개인의 머릿속에만 남아있을 생각이라면 어떤 평가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의 시선이 당신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고려하고도 초연할 수 있을까. 트위터를 주제로 한 소설 ‘누구’의 대사를 인용해본다.

“너, 이런 말도 했었지. (…) 다들 짧은 말로 자기소개를 하거나, 타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고. 그러므로 그 속에서 어떤 말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 난 그건 다르다고 생각해. 짧고 간결하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니까 거기 선택되지 못한 말이 압도적으로 많은 거잖아. 그러니까 선택되지 못한 말 쪽이 더 그 사람을 잘 표현할 거라고 생각해. (…) 그 짧은 말 너머에 있는 인간 그 자체를 상상해 주라고, 좀 더.”

의식한 상태이든 아니든, 가장 내밀한 면을 담은 듯한 게시물도 결국 타인이 볼 것을 의식해 선택된 부분일 뿐이다. 인스타그램은 사진을 중심으로 정보가 공개된다는 점에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한다. 사진은 맥락을 배제하고 순간만을 포착해 제시하는 능력이 있다. ‘누구’의 프로파일링은 구체적 상황이 삭제된 사진 하나를 둘러싼 상상의 결과물인 셈이다. 사진 자체도 SNS상에서나 사용자를 구성하는 일체의 정보일 뿐, 개인으로선 인스타그램에 ‘공유한’ 일상 일부의 의미만 가진다. 누구도, ‘누구’가 될 자격이 없다. 당신은 한순간이라도 ‘누구’를 의식한 적이 있는가. 한순간이라도 ‘누구’가 되어본 적 있는가. SNS는 당신의 자유 공간일지언정, ‘누구’라는 가면이 당신의 자유가 돼서는 안 된다. 투명사회의 마지막 인용이 당신에게 생각의 기회를 제공하길 바란다.

“이미 훔볼트는 인간 언어의 근본적 불투명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 누구도 어떤 말 속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 모든 이해는 언제나 몰이해이기도 하며 생각과 감정의 모든 일치는 동시에 분열이기도 한 것이다.””

 

김윤진 기자
kimblos21@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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