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광장] 이해를 이해하기

표준국어대사전은 이해를 “깨달아 앎” 또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과 같이 정의한다. 남을 이해하는 일은 그를 알고, 헤아리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해라는 말의 무게를 고민하지 않고 가벼이 내뱉는 경향이 있다. 이해의 무게는 “이해한다”는 말만큼 가볍지 않다.

연극 아들(Le Fils)에서 피에르는 우울증으로 학교를 가는 것도 해내지 못하고 버거워하는 아들 니콜라의 정서를 납득하지 못한다. 모든 질문에 “모르겠다”라고 답하며 당연히 해야할 일들을 버려두는 아들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 의지력을 가지려면 자상한 ‘아버지와 ‘정상적인’ 환경이 필요하다고 봤다. 피에르의 아버지 노릇에 니콜라는 꾸며진 ‘아들’ 노릇으로 대응한다. 우울감의 원인을 캐묻는 아버지에게 실연당했다는 답을 내놓고, 새 학교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에르는 상황을 납득케 하는 설명이 주어지고 나서야 아들의 방황을 ‘이해’하며, 자신이 이해한 대로 아들에게 필요한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애쓴다.

아들의 우울을 받아들이는 피에르에게서 진실한 이해는 찾아볼 수 없다. 갖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니콜라가 등교 거부와 자해를 지속하자 피에르는 “다 가졌으면서”, “내가 너의 비위를 맞추려 안간힘을 쓰는데”도 왜 변할 의지가 없냐며 격분한다. 그의 분노는 애초에 니콜라를 향할 수 없다. 자신이 ‘이해’하고 그려낸 시나리오 속 니콜라와 실재하는 니콜라는 다른 인물이다. 피에르는 자신이 니콜라에게, 아들과 전 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떠난 아버지로서 존재 자체가 아들에 대한 몰이해로 정의됐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을 이해한다는 미명으로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아버지의 집에서 니콜라가 주변인으로 정체화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의 어려움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가볍게 다뤄진 이해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나는 너를 이해하므로 내게는 잘못이 없다’는 논리나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은 이상한 선택’이라는 논리는 위험하다. 개인의 이해와 상대방의 선택은 각자의 자유로운 행위로, 서로 연결돼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

물론 자신의 이해에 기초해 상대방의 행위를 설명하고 파악하는 시도를 무의미하다고 일축해버리긴 어려울 테다. 결과적으로 그 배후에 상대방이 없었다 한들, 타인을 잘 아는 위치에 서서 관계의 원활을 꾀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해 가능성을 부정하는 일은 그 모든 노력과 시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인간관계 속 모두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나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했다는 믿음도 개인적인 판단에 불과하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가 아니라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어렵지만 단순하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들어야 한다. 분수에 넘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상대의 상태를 고스란히 바라보는 것을 방해한다. 누군가를 온전하게 직시하는 데는 자신의 경험에 비춰 개연성을 부여하거나 인과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필요치 않다. 자신이 보고 들은 인간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일 때 서로의 현실은 따듯한 거리를 두고 병존할 수 있다. 완전히 이해할 수도 동화할 수도 없는 상대를 삶 속에 들일 수 있는 것은 그 거리와 무지의 산물이다.

관계를 어떤 틀 속에 넣고 스스로에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내려두고, 다만 마음을 열어 보이는 그대로의 타인과 그 관계를 담아내보면 어떨까. 이해의 무게를 이해하고 때로 포기할 줄 아는 건강한 관계 속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김윤진 편집국장

kimblos21@korea.ac.kr

.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