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상실, 대학 문화의 파편화

자치공간은 학생들의 보금자리가 돼 준다. 그러나 최근 본교는 SK 미래관 등 공유 공간을 조성하는 데는 많은 관심을 보인 반면 학생 단체를 위한 고유 공간 수요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했다. 이에 The HOANS에서 자치 공간 수요와 그 중요성에 대해 조명해 봤다.

 

자치공간은 학생사회 문화 창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학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쌓는 곳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는데 독자 공간은 필수다. 하지만 근래 교내 자치공간을 두고 공급 부족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이는 학생 활동과 대학 문화에 있어서도 악영향을 가져오는 모양새다.
지난 4월 총학생회는 학교 당국을 대상으로 ‘교육권 침해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하면서 학생 자치공간 증설이 절실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최근 몇 년간 홍보관이 철거되면서 자치공간은 줄어든 반면 SK 미래관(이하 미래관)과 같은 신축 건물은 대부분 스터디룸과 같은 공간으로 전용돼 자치공간 규모가 크게 줄었다. 동아리와 같은 학생 단체들이 캠퍼스에서 발붙일 곳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장소성, 대학 문화의 버팀목

 

‘장소성’이란 에드워드 렐프의 저서 『장소와 장소 상실』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다. 개인이나 집단은 특정 공간을 지속적으로 사용함에 따라 애착과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인적 경험과 추억 등의 형태로 누적돼 공동체의 정체성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반대로 ▲획일화되고 ▲사용자가 자주 바뀌는 공유 공간은 이런 의미를 가진 ‘장소’로 발전할 수 없다. 이를 무장소화라 칭하며 보통 구성원들의 활동을 저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학생 사회에 있어 장소성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과반 학생회는 과방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기획하며 동아리는 동방을 바탕으로 활동을 운영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가 호전되면서 대동제, 동아리박람회 등 다양한 오프라인 활동이 재개돼 독자적인 공간의 중요성이 한 층 커졌다. 고유 공간이 없으면 친목‧활동에 차질을 빚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비품 보관부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는 여러 개인‧단체가 함께 쓰는 공유 공간이 대체할 수 없는 자치공간만의 특수한 역할이라 볼 수 있다. 캠퍼스가 공유 공간을 중심으로 꾸려질 경우 공간 활용 효율성은 늘어날 수 있으나 학생들의 대학 문화 형성은 치명타를 맞게 된다. 공간에 애정을 갖지 못하고 한 번 사용하면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인식하는 무장소화가 확산할 공산이 크다.

본교 중앙동아리인 역도부의 박정빈 주무(서문 20)는 “정기 집합 시간에는 자유롭게 부원들과 함께 어울리며 운동을 하는 시간을 가지고, 자율 운동이나 주점 및 홍보활동 준비를 위한 공간으로도 사용한다”며 동아리실이 없어선 안 되는 필수요소임을 강조했다. 또한 “오래전에 졸업하신 선배님들도 가끔 추억을 환기하시기 위해 1달에 2~3번 정도 방문하신다”고 말하면서 독자 공간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설명했다.

자치공간의 수축

 

그럼에도 많은 학생 단체들이 고유한 자치공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 개최된 총학생회 자치교류국의 ‘교육권 침해 규탄 기자회견’ 발언 내용에 따르면 전체 학과 중 약 20%인 12개 과에 고유 과방이 부재한 상태다. 학과 구성원들의 친목 도모와 활동 기획에서 과방이 갖는 비중을 고려하면 중대한 문제다.

중앙동아리 구성원들도 극심한 공간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본교 동아리연합회 회장 이용재(경영 19) 씨는 “현재 4개 정도의 중앙동아리가 동아리방이 없는 상태”라고 전하며 “현재 상황으로는 기존 동아리가 방을 빼지 않으면 이들 단체는 공간 배정이 어려운 점을 고려할 때 새로운 공간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또한 “비가 오면 물이 새거나, 냉난방 관련 어려움으로 에어컨 등 기구를 자비로 설치한 동아리도 있다”며 동아리방이 존재하는 단체도 시설 노후화로 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최근 미래관과 같은 신축 건물들이 들어섰으나 학생 자치공간으로는 거의 배정되지 않았다. 해당 공간에는 대부분 공유형 스터디룸‧캐럴이 들어섰다. 이는 지난 2018년 학생자치공간 상당수를 수용해 왔던 홍보관 철거와 맞물려 공간 부족 문제를 더욱 심화했다. 자치공간규모는 줄어든 반면 새로 마련된 공간은 공유 공간에 중점을 두고 배정된 것이다.

본교 유관 부서에 사유를 문의한 결과 “미래관 등의 시설은 본교 모든 학생이 상용하는 교양 시설로 염두에 두고 건축됐다”며 이외에도 건설 비용 기부자의 의견 등 다양한 사유가 반영됐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울러 “앞으로 총학생회를 통해 학교에 공식 의견이 전달되면 관련 부서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학교 당국이 학생 자치공간 증설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지 관심이 집중된다.

 

정경대의 상황은 어떤가

 

정경대학도 학생 활동의 장소성 상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생 활동을 수용할 공간은 많이 필요한 데 반해 그 공급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질적인 공간 부족을 해결할 대안으로 지난 2018년 인문사회관 건립이 결정됐다. 그러나 홍보관을 철거한 뒤 한동안 성북구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공사가 지연됐다. 이후 첫 삽을 뜬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아직 건설을 위한 모금이 마무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완공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인 공간 부족 사례로 동아리방(자치단체실)을 들 수 있다. 공공컨설팅그룹 KULAP(쿠랩)은 정경대 단위 자치단체 5개 중 유일하게 자치공간을 배정받지 못한 상황이다. 현재 쿠랩에서 활동 중인 구성원 A 씨는 “자치공간이 없어 매번 회의는 비대면으로 할 수밖에 없고 대면 세션이 있는 날에는 매번 강의실을 빌려야 한다”며 “앞으로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하는데 자치공간 없이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전했다.

과방의 경우 정경대학 4개 학과에 모두 공간이 배정돼 있으나 면적이 좁은 특성상 열악함은 존재하는 상태다. 특히 ▲정외 ▲행정 ▲통계는 한 학년 인원이 평균 100여 명 수준이고 경제학과는 200명에 가까워 넓은 공간이 절실하다. 현재 정외과 소속 특별기구 ‘모의국회 준비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전차미(정외 21) 씨는 “현재 과실은 공간이 매우 작아 내부에서 단체 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라며 “(과 소속 기구로서) 소유하고 있는 소품이나 자료가 많지만 공간이 제한돼 어쩔 수 없이 많은 물건을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상황을 전달했다.

 

캠퍼스에 둥지를 틀 수 있을까

 

학생 활동의 진정한 창달을 위해서는 각 단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치공간 보장이 절실하다. 자치공간은 단순한 회의, 협업 장소가 아닌 구성원이 애착을 갖고 경험과 추억을 쌓아 가는 장소로 기능한다. 자치 공간이 공유 공간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다. 공간 부족 문제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내 단체가 캠퍼스에서 활동을 꽃 피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최승원·신재용·이정윤·정윤희 기자
2020150060@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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