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後門] 귀를 기울일 용기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마른 논바닥처럼 여러 갈래의 균열과 갈등으로 갈라져 있다. 전통적인 지역 갈등이나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갈등부터 시작해 세대 갈등, 젠더 갈등에 이르기까지의 몇몇 갈등은 이미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균열로 자리잡은 상태다. 매일의 조간신문과 9시 뉴스만을 봐도 여러 사건이나 제도, 정책 따위에 관한 논란과 찬반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이제는 단 하루라도 갈등이 생기지 않는 날은 우리 사회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다만 갈등 자체는 민주사회의 다양한 집단 내에서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갈등이 일절 없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일원화된 여론과 획일화된 정치이념은 권위주의 아래서 억눌린 사회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갈등은 현대 사회의 다원화되고 세부화된 집단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집약해 대변하고 의견을 표출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갈등을 통해서 개인은 자신의 내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하며 외집단에 대한 욕구불만을 해소한다. 집단 역시 갈등과 타협을 통해 비판의식을 갖춤으로써 창의적이고 개혁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갈등에 대한 현대적인 시각이다.

진짜 문제는 갈등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이 좌우 이념갈등, 젠더갈등 등의 이슈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한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은 그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상대방의 반대 입장을 처음부터 부정적이고 편향된 시각에서 바라본다. 물론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상태에서 상대방의 논리가 본인의 가치관이나 이념에 어긋난다면,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이성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을 제대로 듣고 이해한 상태에서 차근차근 비판을 가하는 것과, 상대의 말을 처음부터 입가에 비웃음을 띠고 들으면서 그저 맹목적으로 비난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은 근본이 다르다.

최근의 인터넷 공론장 등에서 행해지는 논쟁들을 보면 이런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자신들의 가치관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네티즌 상당수가 그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말하면 바로 부정적인 집단 프레임을 씌우고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로 일반화하며 매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그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는 전부 업신여기면서 마치 자신만이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양 착각하기도 한다. 색안경을 쓴 채로 갈등의 균열 반대편의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인정해야 할 비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욱 편협한 시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어떤 쟁점에 대해 양측이 모두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갈등의 골은 끝없이 깊어질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균열들은 이런 양상으로부터 초래됐을지도 모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돼야 할 것은 상대측의 입장을 제대로 들을 ‘용기’를 내는 것이다. 심리학자 헨리 타지펠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적 정체성을 고양하기 위해 자신이 속하지 않은 외집단의 부정적 측면에 더 주목하면서 해당 외집단 자체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즉 ‘색안경’은 어떻게 보면 집단심리상 필연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직관적으로 약간의 거부감이 들더라도 ‘용기’를 내어 자신과 정반대의 주장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역지사지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주장을 맹목적으로 수긍하기보다 어폐가 있거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비판할 점은 없는지 되돌아볼 ‘용기’ 또한 필요하다. 이런 태도가 없다면 갈등은 점점 더 심해져 사회분열을 악화시킬 뿐이고 타협점 또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묻자. 나는 언제나 옳은가. ‘우리’는 언제나 옳았는가.

 

이풍환 기자
98tigger@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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