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後門] 명주실 두 줄

해금은 미묘한 악기다. 긴 입죽(立竹)과 울림통에 명주실을 묶어 놓고 말총이 걸린 활을 문질러 연주하는데 일단 제대로 소리를 내기부터가 쉽지 않다. 활을 잡는 자세와 쓰는 방향, 활에 주는 힘의 세기 모두 정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금이 자랑하는 애절하고 처량한 음색은커녕 속된 말로 ‘깽깽이’ 소리만 난다. 한번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면 이젠 음정이 기다리고 있다. 줄을 잡은 손이 0.1cm만 더 움직이거나 힘이 조금만 더 들어가도 음이 바뀐다. 다양한 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으나 음감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음 하나도 안 맞는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해금은 억울한 악기다. 같은 악기라도 여러 변수에 큰 영향을 받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순식간에 소리가 먹먹해지니 케이스에서 꺼내 숨을 쉴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말총에 바르는 송진의 양도 적당해야 한다. 송진이 너무 많으면 탁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송진이 적으면 날카로운 쇳소리가 난다. 이외에도 말총이 얼마나 곧게 펴졌는지, 악기에 송진 가루가 어느 정도 흩날려 있는지 등 신경 쓸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놓쳐 연주회 당일 끽- 하고 삑사리가 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동시에 ‘내가 연습을 얼마나 했는데’ 하며 답답하고 억울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몇 번이고 억울해하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살아가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얼마나 될까. 제멋대로 엇나가는 것은 해금의 음색과 음정뿐이 아니다.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시험을 보는데 여러 까닭으로 ― 가령 몸이 좋지 않았다거나 옆 사람이 시끄러웠다거나 ― 공부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해도, 그러니 억울하다고 해도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정으로 지하철이 늦어져 일터에 지각해도 흘러간 시간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실상 인간의 삶이란 억울함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상에 독립적으로,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이 연관돼 있음을 받아들이면 억울함이란 감정을 한 꺼풀 깊이 들어가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해금으로 아무리 좋은 소리를 내고 싶어도 비가 오면 먹먹한 소리가 나듯이, 아무리 빨리 길을 가고 싶어도 막힌 도로를 뚫을 순 없듯이, 사물 또는 존재 그 자체의 특성과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일은 없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란 곧 온갖 존재와 그들의 의지가 거미줄처럼 엮이는 복잡한 관계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의지는 세계의 현상과 타인의 의지 앞에 쉽게 좌절되기 마련이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업적, 남과 차별되는 특별한 성취 ― 궁극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인정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곧 억울함의 근원이 된다. 바로 그 욕구의 좌절이 억울함으로 이어지기에 그렇다.

언제나 바라는 대로 일을 이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겨우 명주실 두 줄로 만든 악기도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거대한 사회와 세계의 변화에 있어서랴. 그러나 이것이 삶에 대한 낙망과 단념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듯하다. 우리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부평초처럼 세상의 흐름 따라 떠다니는 삶을 살자는 말은 아니다. 해금이 아무리 제멋대로일 때가 있더라도 연주자들은 그런 악기를 놓지 않고 매일같이 연습하며 길들인다. 처음에는 거칠고 드센 악기도 수개월, 수년에 걸친 연주자의 연습과 노력을 거치면 점차 깊고 그윽한 음색을 자랑하게 된다. 시작부터 완벽해지고자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작은 노력을 통해 매일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어제보다 더 나아지면 된다. 日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 〈대학〉의 한 구절이다. 이러한 태도가 억울함을 대하는 하나의 작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진형 기자

jiiinn@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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