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後門] 잠시만 도망가자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적어지고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 바로 일과가 끝나면 모자를 쓰고 에어팟을 낀 채, 노래를 들으며 아파트 벤치 앞에 멍하니 1시간 동안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벽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른 아침, 느긋한 오후, 활기 넘치는 초저녁에도 산책을 해봤지만 새벽 특유의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분위기는 이기지 못한다. 이에 한동안 새벽의 매력에 빠져 늘 하루를 집 안이 아닌 집 밖에서 매듭지었다. 복잡한 하루 일과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하루 중 어떤 때보다도 소중하게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 같이 벤치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던 중 잊고 지냈던 MC몽의 ‘도망가자’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수를 두고 논란이 많아 친구들에게 쉽게 추천하지 못했지만 인생곡으로 삼았던 곡이다.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나에게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줬다.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해주는 노래였고, 개강을 하루 앞두고 도저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친구들에게 울면서 전화할 때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준 노래였다.

그리고 또다시 우연히 흘러나온 노래는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차오르게 했다. 아무 계획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인다면 일상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듯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음 날 새벽 6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양양편 버스표를 끊고 무작정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충동적인 여행은 원래의 나라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동안은 몇 주 전부터 숙소, 맛집, 관광지 등 루트를 치밀하게 계산하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계획적인 여행을 즐겼던 내게 이번 여행은 새로운 도전에 가까웠다.

버스를 타고 양양으로 향하면서도 ‘도망가자’라는 노래를 반복재생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는 새로움을 찾아 떠나겠다는 의지를 점화한 노래가, 막상 떠나는 상황에서는 막연함으로 다가왔다. 이제 겨우 목적지만 확실해졌을 뿐, 무엇을 볼지, 무엇을 먹을지조차 생각하지 않았기에 하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도저히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막연함은 이내 두려움이 됐다. 처음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에서 시간을 알차게 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움을 찾아 일상으로부터 도망쳤는데,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이 버스 창문에 비쳤다.

그러나 미리 만들어 놓지 않고 만들어나가는 여행은 두려움과 낯섦마저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했다. 맛집이 어딘지 모르니 내가 가는 곳이 곧 나만의 맛집이었다. 어떤 카페가 사진찍기 좋은지 모르니 내가 가는 곳이 곧 나만의 사진 명소였다. 어느 관광지가 유명한지 몰랐지만 무작정 걸음을 내디딘 바닷가가 영원히 추억으로 저장될 장소가 돼주었다. 누군가의 방식으로 즐긴 여행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즐긴 여행이었다. 막연하게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떠났던 여행은 곧 나를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 채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여행이 됐다.

일상으로부터 지쳤거나 계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목적지조차 정하지 않고 아무 계획 없이 각자가 출발할 수 있는 장소에서 즉흥적으로 떠나볼 것을 추천한다. 일상으로부터 도망가는, 다시 말해 지겨운 반복에서 자유로워지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 모른다. 도망이라는 말에 과대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피하거나 달아나는 것만이 도망이 아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 계획 없이 잠깐의 여유를 가지는 것도 도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도망을 두려워하는 생각에서도 도망쳐, 가끔은 도망을 가보자.

 

민건홍 기자
celestial@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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