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後門] 죽음을 선택할 권리

평소 필자는 죽음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꺼림칙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필자는 아직 팔팔한 20대이기에 죽음에 크게 와닿는 게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이렇듯 죽음에 무관심했던 필자는 최근 죽음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뉴스 두 개를 접하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는 세기의 미남으로 불리는 프랑스 원로 배우 알랭 들롱이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뉴스였다. 그는 지난 2019년 뇌졸중 수술을 받은 후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면서 건강이 악화하면 아들에게 죽음을 지켜봐달라고 전했다. 유명한 원로 배우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하자 그 결정을 응원하는 댓글이 수십 개 달리는 등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소식치고 굉장히 훈훈한 뉴스였다.

반면에 두 번째 뉴스는 필자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지난 2월에 암 투병으로 고통받던 지인의 자살을 도운 40대 여성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였다. 지인이 암으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 절친했던 해당 여성에 죽음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해당 여성은 지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그녀를 선처해달라는 지인의 유서와 유족의 요구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자살방조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명 배우의 안락사 결정 소식이 들리자 우리나라에서 다시 안락사에 관한 관심이 집중됐다. 안락사는 현재 찬반 논쟁이 뜨거운 이슈 중 하나다. 해외 사례를 보면 스위스·캐나다·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에서 적극적인 안락사를 시행하고 있지만 엄격한 절차를 거친 후 의사 단체의 도움을 받아 안락사를 결정할 수 있다. 외국인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거나 치료 가능성이 없고 의사 표현이 명확한 상태인 사람만 심사를 허용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죽음에 대해 꽤 보수적인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락사가 법규상 금지돼 있고 그간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자체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유교 문화로 인해 안락사를 생명 경시, 조력 자살로 여겨 금기시하는 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모 병원 의료진이 가족의 요구를 들어 환자 연명치료를 중단했으나 환자가 숨지자 바로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았을 정도다. 법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를 제한함에 따라 병원이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퇴원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정작 환자와 가족은 계속 고통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진전되면서 지난 2018년부터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고 있다. 병세의 호전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한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약하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됐다. 지난 4년간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결정한 사람이 12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다만 안락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일각에서는 안락사를 환자에 대한 방치 혹은 포기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락사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선택지이다. 안락사가 계속되는 고통 끝에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사람의 권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대수명이 많이 늘어난 세상이다. 100세 시대를 넘어 조만간 120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병으로 인해 고통받으면서까지 삶을 연장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기 어렵다. 삶이란 적어도 건강하게 살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요양병원에 꼼짝없이 누워 인공호흡기와 링거에 의지하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죽음 선택할 권리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정윤 기자
justinmanu1@korea.ac.kr

.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