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이고 □□을 위해 △△△를 선택했습니다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개개인을 존중하는 대학생들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The HOANS에서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조명해 봤다.

79년생 이미영(가명)

  이미영 씨는 1979년 1월 26일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6살, 3살 터울의 오빠들이 있어서 막내 여동생으로 가족의 예쁨을 많이 받고 화목한 유아기를 보냈다. 특히 작은 오빠와 사이가 좋아 초등학교 때는 같이 등교했다. 큰 오빠와는 나이 차이도 크고 군대, 유학 등의 사유로 친해질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였고 어머니는 주부였으며 가족 관계가 좋아서 다양한 활동을 같이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스승의 날, 선물을 많이 받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을 꿈꿨다. 이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타인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자신을 깨닫고 의사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 생활 중에는 공연, 음악, 영화 등에 관심이 생겼다. 고등학교에 가서 무료 연극 공연 활동을 하던 김지숙 씨에게 연락해 3개월 동안 연극을 준비했다. 그러나 공연 준비로 바빠서 정작 보고 싶은 공연이나 다른 문화를 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뒀다.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 매일 밤을 새워가며 일했음에도 행복함을 느껴 경영대로 편입을 결심했다. 마케팅이 자신과 잘 맞는다고 판단해 26살 때 온라인 광고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광고 회사는 항상 ‘을’이라고 느껴 이직했다. 미영 씨는 4년 동안 4개의 회사에서 근무했다. 마지막으로 옮겨간 회사에서 10년 동안 근무하고 있다. 미영 씨는 그녀가 미련이 남았던 일들에 도전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 미영 씨는 4개의 회사를 거치며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은 없었다고 한다.

  미영 씨는 학창 시절 때 연애를 했지만 이에 몰두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비혼을 택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주변 사람들이 주는 결혼 재촉으로 인한 스트레스, 결혼 후 자유로운 삶의 상실에 대한 우려 때문에 결혼 생각을 접었다. 노후의 외로움과 경제적 기반이 걱정되지 않느냐의 질문에 미영 씨는 자기 세대는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자식들이 부모를 부양할 수 없는 세대라고 답했다. 또 미영 씨는 노후에 대한 걱정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다고 했다. 미영 씨는 친구와 맛집 탐방과 여행을 즐기며 셰어하우스를 계획하고 있다.

79년생 조은주(가명)

  조은주 씨는 1979년 11월 16일,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딸이 셋인 집안에서 태어나 여중과 여고에 진학하고 여학생 비율이 높은 음대에 진학했기 때문에 이성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 공부를 잘했던 언니들은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 은주 씨도 인문계를 생각지 않고 산업디자인 특성화고로 진학해 미술을 배웠다. 중학생 은주 씨에게 대학은 의미가 없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밴드부에 들어가면 장학금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밴드부 활동을 하며 전기기타에 빠졌다. 밴드 활동과 음악에 빠져 결국 음악대학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은주 씨가 인문계에 진학하길 원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와 반년간 말을 안 한 적도 있었다.

  집안 형편상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바로 갈 수 없었다. 부모님께 도움을 받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은주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등록금, 입학금, 레슨비 등 음대 특성상 지출이 많아 아이들을 교습하고 축가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도 성적장학금을 반드시 받아야 했다. 졸업 후에도 가르치는 아이들의 수와 행사의 빈도를 늘리며 일했다. 생활은 안정적이지 못했고 저축도 어려웠다. 은주 씨는 남편과 결혼할 때 모은 돈이 많이 없어서 미안했다. 하지만 은주 씨는 음악이 있었기에 그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지금도 은주 씨는 교회 음반작업, 지휘, 레슨 등을 하며 바쁘게 살고있다.

  은주 씨는 서른셋에 마흔 살의 남편을 만나 서른넷에 결혼했다. 보통 서른쯤 결혼한 또래 친구들에 비하면 늦었지만 마음은 여유로웠다. 은주 씨는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았을 때 IT분야 종사자라 자신과 접점이 없고 나이 차가 커 처음에는 주선 제안을 사양했다. 여러 번 거절하다 만난 자리에서 마법처럼 둘은 마음이 통했다. 세 자매 중 막내인 은주 씨와 삼 형제 중 둘째인 남편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지만, 점차 마음을 맞춰나갔다. 결혼식도 허례허식 없는 스몰 웨딩을 하기로 마음이 맞았다.

  은주 씨의 딸 장예지(가명) 양은 6살이다. 은주 씨는 다자녀를 꿈꿨지만, 결혼이 늦은 만큼 육아에 필요한 금전적인 부분을 고려할 수밖에 없어서 외동으로 기르자고 마음을 굳혔다. 은주 씨는 요즘 세상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누구 엄마’, ‘누구 아내’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은주 씨는 자신의 이름을 간직하고자 꾸준히 자기 일을 하는 중이다.

79년생 최수진(가명)

  최수진 씨는 1979년 1월 14일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2살 터울 오빠와 5살 아래 남동생을 비롯해 수진 씨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고, 그래서인지 유년기에는 자존감이 낮았다. 한편 학창 시절은 노력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화학 선생님이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에 반해 열심히 공부해서 화학과에 진학했다.

  수진 씨는 97학번이지만 IMF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해져 학부생 시절을 즐겁게 보냈다. 취업이 어려워 수진 씨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화학과 일반대학원에 진학했다. 신약개발 과정에서 사람을 찾던 교수님의 눈에 들어 일은 술술 풀렸다. 졸업 직후 대전 화학연구소 인턴 자리를 주선 받았다. 당시 연구가 최상의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긴장감이 줄어든 수진 씨는 향수병과 함께 연구 활동에 흥미를 잃었다. 마침 모교 타 학과 공대 교수님으로부터 수진 씨의 전공이던 유기합성을 신소재 분야에 활용해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때 수진 씨는 아직 20대였다.

  흔쾌히 순천으로 돌아간 수진 씨는 지금의 남편을 상사로 만났다. 수진 씨는 당시 연구원 중 홍일점으로 대외적으로 주목받았지만, 내부에서는 평범한 연구원이었다. 지금의 남편과의 결혼과 남편의 경기도 이직이 결정되자 수진 씨는 쉬면서 결혼을 준비하고자 했다. 그런 수진 씨를 찾은 것은 벤처 기업을 준비하던 여자 선배였다. 수진 씨는 직원들을 이끌며 눈에 띄는 실적을 올렸던 1년 반이 정말 즐거웠다. 지금도 선배는 수진 씨의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수진 씨는 34살에 결혼했다. 노산을 걱정했기 때문에 바로 임신을 계획했다. 남편을 따라와 시작한 타지 생활과 임신으로 인한 경력 단절은 수진 씨를 우울하게 했다. 남편의 인생은 가정이 생긴 것 외에는 그대로지만 자신의 인생은 너무나 달라졌다는 생각에 남편과 자주 부딪히기도 했다. 결혼 전에는 시련이 없는 것 같았던 수진 씨는 요즈음 가끔 삶이 힘들다고 느낀다. 서른여덟, 수진 씨는 오른 다리를 절게 됐다. 지방에 있던 엄마 대신 시어머니가 재활을 도왔다. 불편함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수진 씨는 삶의 변화를 도모하는 중이다. 이전까지는 아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까지 집안일만 했지만, 최근엔 또래 엄마들과 영어 회화 스터디를 연다. 재활의 일환으로 몸의 균형을 찾기 위해서 필라테스를 다니고, 마을 교회에서 바이올린도 배운다. 8월 말 성공적으로 공연을 끝냈다. 무대를 겁내던 수진 씨에게는 뿌듯한 경험이었다.

81년생 손은영(가명)

  손은영 씨는 1981년 3월 3일, 자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동생과는 다섯 살 터울이라 나이 차이가 좀 난다. 아버지가 장남이셔서 가까운 친척 어른들과 생활하기도 했지만 은영 씨가 친가 쪽 맏이였을 뿐만 아니라 사촌들이 거의 여자였기에 성별로 차별받는 일은 없었다. 은영 씨의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으셔서 은영 씨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과외를 시켰다.

  은영 씨는 한 학년에 600명이 넘는 여중에 진학해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소위 말하는 ‘중2병’에 걸려 공부를 조금 소홀히 한 적도 있지만 꾸준히 학원에 다니며 공부했다. 여고로 진학한 은영 씨는 자연계열 관련 분야, 특히 건축학에 관심이 생겼다. 자연계 학과 중에서도 건축 쪽은 여성 선호 비율이 높을뿐더러 은영 씨는 진학 자체를 우선했기 때문에 딱히 성비를 고려하지는 않았다.

  대학교에서는 이공계 전공 중에서도 유일하게 실험을 하지 않고 실험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는 수학을 전공했다. 몇 차례 휴학하며 학생 신분을 즐겼다. 졸업 이후에는 학점이 높지 않고 당장 일하기 싫어 교육 대학원에 진학하는 길을 택했다. 은영 씨는 대학원을 다니는 5학기 동안 인생에 여유를 벌고 교원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만족했다.

  은영 씨는 대학원을 졸업한 후 임용고시에 한 번 도전했으나 시험에 떨어지자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 다른 길을 찾다가, 29살이 되던 해 한 외국어고등학교의 기간제 교사로 채용됐다. 경력이 없었지만 운 좋게 취직했다고 생각했다. 이 때 1살 연상인 남편을 만났다. 첫 학교에서 1년간 근무한 은영 씨는 다른 학교의 입학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듬해 다시 교직에 섰다.

  은영 씨는 2년 반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당시는 결혼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기에 은영 씨도 이에 따랐고, 이듬해 출산하게 되면서 2년간 휴직했다. 이후 복직해 2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다시 휴직한 상태다. 지방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평소 아이는 부모님께 맡겼고 가족들은 주말에만 모였다. 휴직 기간이 끝나며 복직이 다가오고 있지만 은영 씨는 아이가 걱정돼 복직을 고민 중이다.

87년생 이지혜 (가명)

  이지혜 씨는 1987년 2월 12일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높았던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학원에 많이 다녔지만, 인생의 전환점은 스무 살이다. 원치 않게 진학했던 학과에서 반수한 지혜 씨는 유아교육과와 간호학과를 고민하다가 간호학과로 진학했다. 취업을 이유로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학은 지혜 씨의 적성에 생각보다 잘 맞았다. 지혜 씨도 간호사 집단이 여자 군대라는 말을 들었지만 막상 직장에서 소위 심한 ‘태움’을 겪지는 않았다.

  지혜 씨는 남자 간호사들이 일반 병동보다 중환자실이나 특수병동으로 주로 배치되는 것이 의아했다. 체력이 요구되는 일에 남자 간호사들이 배치된다고 추측했다. 한번은 동료로부터 남자 간호사가 혈압을 재면 환자가 불편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혜 씨는 수술실에 모인 전 직원 중 남자 간호사가 단 3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지혜 씨는 요즘은 간호대학 남학생 비율이 거의 1/3에 달한다는 소식이 신기하다.

  지혜 씨는 간호사로서는 드물게 일반대학원에 진학했다. 실무로 복귀할 생각은 없기에 병원 현장 실무 중심의 특수대학원보다 학술 연구에 초점을 맞췄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수업은 즐겁지만, 현실과의 괴리감을 점점 느끼고 있다. 대학원은 병원보다 직급 구분은 모호해도 분위기는 사회보다 엄격하다. 교수를 위해 짐을 드는 일 등은 모두 암묵적으로 대학원생의 몫이다.

  최근에 지혜 씨는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아버지가 직장 동료들로부터 딸의 교육에 왜 돈을 많이 들이냐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거제 조선소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고집이 세지만 지혜 씨의 첫 기억이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하러 갔던 추억일 정도로 가정적인 분이다. 아버지는 노후자금으로 예정됐던 퇴직금으로 지혜 씨 언니의 유학을 보조했다.

  지혜 씨는 지금의 삶을 즐기는 중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현재가 행복하다. 가정에 얽매이는 친구들을 보면서 결혼하고 아이를 갖더라도 자신의 삶을 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서른둘인 지혜 씨는 결혼 적기를 고민 중인데, 결혼과 출산을 개인적인 중대사로 생각하긴 하지만 적어도 석사 수료 이후로 미루기로 정했다. 8년을 사귄 남자친구는 지혜 씨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지혜 씨는 한국에서 간호사의 육체적·정신적 노력과 비교하면 사회적인 존중이 여전히 덜하다는 생각에 아쉽다. 대우가 좋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인력도 많지만 지혜 씨는 한국에서 마저 박사 과정에 진학해볼 생각이다.

여성들의 삶을 조명해보면서

여성들은 각자의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 선택을 내리며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다. 존중과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여성에 대한 담론은 여성들의 선택을 사회 구조의 틀 내에서 이뤄진 것이라 섣불리 일반화할 위험이 있다. 거시적 접근만을 강조한다면 개인의 주체성과 자의성을 경시하게 된다. 인간은 사회 구조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개인의 삶을 사회 구조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아닐까?
이지영·김원섭·박지우 기자
cooljlee001@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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