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전가되는 한 동 남기기 정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재임 당시 근현대 문화유산을 후대에 남기자는 취지로 시작된 ‘한 동 남기기’ 정책은 오세훈 시장 취임과 함께 폐기되는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정책을 시행할 때도, 폐지할 때도 충분한 숙의 없이 정책이 강행됐고 그동안 피해는 주민에게 떠넘겨졌다. 한 동 남기기 정책 전개와 폐지 과정, 그리고 실제 당사자인 주민의 실상까지 The HOANS에서 취재했다.

 

한 동 남기기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서울시 아파트 개발 초기 모습을 남겨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는 정책이었다. 박 전 시장이 추진한 도시 흔적 남기기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했으며 지난 10여 년간 적극 추진돼왔다. 그러나 ▲주민 ▲조합원 ▲서울시 간 입장 차이로 인해 갖은 잡음이 발생했다.

지난해 4월 오 시장의 당선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작년 6월 서울시와 강남구 개포 주공아파트 재건축조합 간담회에서 한 동 남기기 폐지를 두고 논의가 이뤄졌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존치 여부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지만 지난 12월까지도 철거에 대한 결정은 유보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월 서울시가 공개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 변경안에 해당 정책이 포함되지 않아 한 동 남기기 정책은 사실상 폐지 단계에 접어들었다.

 

세계적 추세 따라 도입된‘근현대 흔적 남기기’

 

도시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흔적을 문화유산으로 남기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독일 ▲일본 ▲영국 등 국가에서는 산업구조와 생활양식 등 변화로 외면받는 구도심 흔적을 이전부터 재생 사업과 연계해 탈바꿈해왔다. 지난 2006년 일본에서는 일본 근대 건축물의 상징인 도준카이 아오야마 아파트를 새로운 건축물의 일부로 활용한 오모테산도 힐즈가 완공됐다. 해당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살림과 동시에 주민 문화·여가 공간으로 사용한다는 취지다. 서울시가 한 동 남기기 정책을 추진한 것도 이와 같은 세계적인 흐름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동 남기기 정책은 2011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소위원회 회의에서 처음 언급됐으며 이듬해 ‘근현대 유산의 미래 유산화 기본구상’으로 발표돼 박 전 시장 재임 기간 적극 추진됐다. 2015년까지는 해당 정책 추진을 위해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 조례 개정 등 법무상 절차가 이어졌으며, 2016년 전수조사 용역 실시를 통해 2018년에는 대상지 선정이 완료됐다.

서울시는 한 동 남기기 정책 목적에 대해 근대화가 이뤄졌던 6·70년대 생활상과 사회 경제의 모습을 잘 드러낸 아파트 한 동을 남김으로써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존하기 위함이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재개발에 속도가 붙음에 따라 해외보다 도시 역사 잔재가 빠르게 소멸할 위기에 처한 점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재산권 논란 속 강행된 한 동 남기기

 

그러나 한 동 남기기 사업은 진행 과정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우선 조합, 주민 등 지역 구성원과 합의가 부족했다. 서울시는 아파트를 포함해 문화재급은 아니지만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에 대해 자발적 보존을 골자로 하는 ‘미래 유산’ 선정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다수가 소유권을 공동으로 행사하는 아파트는 전원의 동의를 받기 어려워 선정에 차질을 빚었다. 그렇다고 시가 한 동을 구매하기에는 비용 문제가 대두되자 서울시는 선정된 단지 내 한 동을 기부채납 받아 사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기부채납이란 용적률 상향을 조건으로 건축물, 부지 등을 기부받는 제도이다. 문제는 이 기부채납이 재건축 허가에 있어서 사실상 필수 요건으로 상정됐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서울시가 행정력 남용으로 주민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신속한 재건축 승인을 위해 일이 급하게 이뤄졌던 관계로 주민 측의 상황 인식 및 반발은 재개발이 이미 일부 진행된 2019년이 돼서야 일었다. 서울시는 기부채납에 상응하는 혜택이 있기에 재산권 침해는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 동 남기기 대상 아파트 선정기준을 두고도 논란이 불거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난방 시스템 도입 아파트라는 이유로 한 동 남기기 사업이 추진됐던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는 15층 아파트를 4층까지만 남겼다. 해당 동 부근에 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에 따라 공원 부지 내 4층 이상 건물을 제한하는 내용의 도시공원법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울시는 중앙난방 시스템의 상징인 굴뚝을 남기도록 권고했지만 주민의 반발로 이뤄지지 않아 본래 남기고자 했던 상징물 없이 아파트 한 동 일부만 덩그러니 남는 상황이 연출됐다. 이에 오래된 건축물이 모두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건 아니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유산 보존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보존하고자 하는 역사성을 잃어버린 흉물을 남길 뿐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야오야마 아파트가 역사성 보존과 실용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한 것에 비하면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시장 교체와 함께 뒤바뀐 흐름

 

이렇듯 박 전 시장 시절 강력하게 추진됐던 ‘근현대 흔적 남기기’ 사업은 202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된 후 판도가 달라졌다. 오 시장은 근현대 흔적 남기기 사업을 전면 중단했다. 본래 흔적 남기기 사업 대상으로 지정됐던 개포 주공 1·4단지와 잠실 주공 5단지도 철거를 결의한 상황이다. 지난 2월 발표된 서울시 정비계획변경안에서도 관련 내용이 빠지면서 해당 정책은 사실상 공식 철회됐다.

오 시장의 이런 결정은 기존 시정과 차별점을 두기 위한 이유라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오 시장의 경우 박 전 시장과는 달리 강력한 재건축 활성화 정책을 추구한다는 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 전 시장의 ‘근현대 흔적 남기기’ 사업이 재건축 규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지적도 존재했다. 고준석 동국대 겸임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 동 남기기 사업으로 선정된 4개 단지가 모두 강남권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았나”는 의견을 밝혔다.

오 시장의 근현대 흔적 남기기 정책 철회를 비롯한 재건축 활성화 행보는 아파트를 넘어 서울 시내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옛 성동구치소 부지의 구치소 감시탑은 유적으로 남아있을 예정이었으나 지난 9월 오 시장은 감시탑을 철거해 그 부지에 공공주택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2월에는 광진구 능동로 골목시장과 성북구 성북동 참새마을 일대에 예정됐던 골목길 재생 사업을 철회했다. 이를 두고 서울시는 일련의 재개발 행보가 집값 하락을 통한 민생 안정에 기여하리라 전망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오 시장의 행보가 그저 ‘전 시장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진행되면서 근현대 유적을 철거하고 있다는 비판 또한 제기하는 상황이다.

 

좁혀지지 않는 의견 사이의 쟁점은

 

 

근현대 흔적 남기기 정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 대립이 지속하고 있다. 근현대 생활 흔적을 보존해야 한다는 측과 재건축 등에 문제가 될뿐더러 주민들의 재산권 및 주거권, 안전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맞서는 상황이다. 이는 박 전 시장과 오 시장 양측 모두 충분한 협의 없이 다소 일방적인 통보로 해당 사업 존폐를 결정한 점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도시 흔적 남기기 시민 공감대 형성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진행 중인 흔적 남기기 정책에 대한 설득이 현지 주민들에게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업에 대한 만족도 질문에서는 재건축 해당 지역 주민 중 86%가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한 동 남기기 사업 부지에 어떤 시설을 원하는지 묻는 질의에서도 건축물보다는 단지 내 수목이 압도적인 득표를 얻었다.

목적에서도 쟁점이 나뉘었다. 과거 보존을 목적으로 두는 측은 40년 된 아파트의 흔적과 시민의 생활 및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보장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과거 양식을 남겨두면 후손들이 현재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어 후대에 역사를 남겨줄 수 있다는 의도다. 최초의 중앙난방 시스템 도입 아파트라는 의미에서 잠실주공5단지의 한 동을 남기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재건축을 목적으로 두는 측은 단지마다 다른 적용이 이뤄질 경우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공권력 남용이라는 입장이다. 또한 현재 시민들도 공감하기 힘든 문화유산을 미래 세대가 공감할 수 있겠냐는 문제도 제기된다. 서양 근현대 건축물은 내화벽돌처럼 안정된 건축자재를 사용해 개보수 과정을 버틸 수 있지만 철근-콘크리트 방식으로 빠른 양생을 거친 한국 건축물은 부식으로 내구성이 심각하게 저하된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리모델링 등으로 존치하기에는 안전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아파트가 역사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사유재가 공공유산으로 적합한지 ▲남겨질 건물을 어떤 용도로 쓸지 등에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다. 이처럼 근현대 문화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의견 대립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만 시 전체의 공익 목적과 해당 택지 소유자의 재산권 등 다양한 문제가 결부돼있어 속단은 어렵다. 문제는 재건축과 한 동 남기기 대상 건물의 적절한 보존 모두 지연돼 주민 측 피해는 날로 늘어가고 있는데 반해 이에 대한 보상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르포: 직접 가본 반포 주공1단지

 

 

본지는 한 동 남기기가 미치는 영향과 인근 주민의 의견을 더욱 생생하게 청취하기 위해 탐방 취재에 나섰다. 선정 지역은 1973년 건립된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단지 아파트이자 1970년대 강남개발이 본격 시작됐던 시기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 동 남기기 정책 대상으로 지정됐다. 반포주공1단지는 오 시장의 근현대 흔적 남기기 정책 철회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주거단지다. 해당 단지 108동은 정비를 거쳐 주거역사박물관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본지 또한 이러한 역사적 의미와 취재 가능 여부를 감안해 해당 지역을 취재지로 선정했다.

금요일 점심, 동료 기자와 함께 한 동 남기기 현장 답사를 위해 안암역 2번 출구에서 만나 반포 주공 아파트로 향했다. 무작정 가보자고는 이야기했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현재 재건축 중인 지역이기 때문에 인근 고지대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한 동 남기기 사업 대상 자체를 보긴 힘드리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반포역에 도착했을 때 아파트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아파트라 하면 줄곧 10층 이상 고층 건물만 봐왔기 때문에 상가 뒤로 높은 건물이 보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포 주공 아파트는 5층 정도의 높이였기에 보이지 않았다. 초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요즘과 다른 모습에 해당 아파트가 꽤 오래전에 지어졌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재건축 중이라 단지 내로 진입하기 힘들 거란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재건축 ‘준비’ 중이라고 하는 게 더 가까운 표현인 듯했다. 특별한 펜스 없이, 사잇길을 통해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있었고 단지 내로 자동차를 끌고 진입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초 계획에는 없었지만 들어갈 수 있게 된 이상 108동을 찾아가 보자며 단지 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108동이 단지 가장자리에 있기도 하고 아파트 단지가 워낙 커서 건물 하나를 남기거나 없앤다고 해서 티 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걸어갔다. 108동에 도착하니 마찬가지로 5층짜리 저층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공가’라고 쓰인 빨간 딱지가 건물 곳곳에 붙어있고 페인트가 벗겨져 금이 생긴 모습을 보니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건축 준비 기간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별도의 관리가 이뤄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리모델링 비용이 많이 들 것 같다는 생각에 해당 아파트의 역사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짚어보게 됐다.

한 동 남기기 정책에 대한 주민의 의견은 엇갈렸다. 이전 한 동 남기기 대상지로 선정됐던 개포 주공단지에서 거주했다고 밝힌 A 씨는 “아이들이 과거 역사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운을 띄우면서도 “한 동이 있고 없고가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만 “건물 상태가 좋지 않은데 만약 박물관으로 개장하고자 한다면 충분한 안전 점검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안전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한편 반포주공1단지 이주대책센터에서 근무하는 B 씨는 해당 건물이 지어진 연도가 그렇게 길지도 않을뿐더러 건물 내부가 이미 많이 바뀌었음을 지적해 보존 가치가 그렇게 높지 않음을 강조했다. 특히 한 동 남기기 참여를 조건으로 용적률 제한 완화 등 조건이 걸렸던 것을 두고 “애초에 그런 식으로 조정 가능할 조건이었으면 재산권 자유를 위해서라도 처음부터 완화된 기준이 적용됐어야 한다”며 한 동 남기기를 사실상 강제했던 시의 행보를 비판했다.

탐방과 인터뷰를 통해 역사성과 보존에 대한 쟁점도 중요하지만, 과연 건물이 실질적으로 보존 가능한 관리상태를 유지하는가도 유적 보존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함을 확인했다. 무엇보다도 실제 거주하고 공간을 활용하는 주민의 상황과 의사를 고려하는 작업이 선행됐어야 함이 명백했다. 특히 재건축 과정에서 주민들이 피해를 받고 있는데 반해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고, 모든 과정에서 시민 측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아쉬움 또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개발과 보존 병행한 해외의 사례

 

앞서 산업화가 진행됐던 유럽 국가들도 근현대 문화유산을 두고 재건축과 주거단지 보존 사이에서 다양한 진통을 겪었다. 이런 문제는 비단 산업화 시기뿐만 아니라 중세나 고대 유적 등 과거 기준 역사 유적에 대한 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강력한 재건축 규제를 원칙으로 역사 유산 보호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유산 보존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보존 가치가 있는 유산이 밀집돼있는 점에 착안해 특정 건물을 보존 유산화하는 방안보단 지역 전체를 보존지구로 설정해 다른 건물과 통일성을 유지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하지만 건축물 개조·보수에 대한 규제는 상대적으로 완화돼있다는 점에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원형을 어느 정도 유지한다면 재개발 자체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는 낙후돼 버려진 시장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건물은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시설을 추가하고, 낙후된 외관을 현대적인 디자인 공모를 통해 리모델링했다. 이러한 리모델링은 단순 보존에 그치지 않고 최근 감수성을 더해 시장에 경쟁력을 만들어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목적까지 같이 달성했다.

물론 이들 국가에서도 연식이 오래된 것에 비해 내외부 단장이 제한적인 점을 이유로 전면 재건축을 요구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 아파트와는 달리 서구권 구도심 역사가 길게는 2~300여 년도 됐다는 점을 보면 건물을 활용한 시간이 훨씬 길었음을 알 수 있다. 해외 성공 사례에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이들 모두 정책 집행에 있어서 개발과 보존을 이분법으로 구분해 한 가지만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역을 재개발하는 경우에도 조형물을 남겨 일부를 주변과 조화롭게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보존이 결정된 경우 합리적 기준을 통해 개발 가능성을 남긴 전적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 공동체에 시사점을 준다.

 

‘무엇을’ 남길지보다는 ‘어떻게’ 남길지 생각해야

 

 

사례 조사와 현장 탐방에서 공통으로 강조되는 점이 존재했다. 근현대 유산을 후대에 남긴다는 공익도 중요하지만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요구 또한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공익적 가치는 이를 보존하는 과정 또한 공익에 합치해야 한다. 기부채납이나 재개발 허가를 조건으로 내건 사례처럼 부당한 정책 참여 종용도, 논의 없는 정책의 일방적인 중단도 지양돼야 한다. 무엇보다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 의견이 적극 반영돼야 한다. 시의 독단적인 정책 집행에 피해를 겪은 주민을 위한 충분한 보상 없이는 건물 보존도 재개발 속행도 현실을 무시한 공염불일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주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개발과 보존이 병행되는 유럽의 선행사례는 나름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리 공동체의 가치가 무엇인지 또한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영국과 프랑스의 재건축 규제는 해당 주택에 단순 재산 이상으로 후대에 물려줄 만한 문화적 가치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제정됐다. 이는 우리가 남길 정체성과도 연관된다. 일회성 정책에서 그치지 않고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다음 세대에 어떤 가치를 물려줄지에 대한 논의 또한 필요한 이유다. 반포주공1단지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합의 없이는 건물 관리조차 잘 이뤄지지 않아 보존 가치 유무와 상관없이 보존이 어려운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후대에 무얼 남기느냐가 중요한 만큼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남길지’,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또한 중요하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의 과거와 미래를 둔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신재용·정서영·정채빈 기자
2021150041@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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