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진실과 허구 사이의 줄타기

최근 역사와 상상력을 조합한 팩션 영화가 많다. 지난 7월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에 관한 역사왜곡 논란이 일어 화제의 중심이 됐다. 팩션 영화에서 영화적 허구와 역사왜곡 사이의 선은 어디인지 The HOANS가 살펴봤다.

‘팩션’은 사실을 뜻하는 팩트(fact)와 허구를 뜻하는 픽션(fiction)의 합성어다. 팩션은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일컫는다. 이는 역사성과 오락성을 함께 구현한다는 특징으로 인해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실제로 역대 최고 흥행작인 ‘명량’을 비롯해 ▲암살 ▲광해 ▲택시운전사 등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영화 19개 중 9개가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 영화였다.

‘나랏말씀’을 승려가 만들다?

하지만 지난 7월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이면서 팩션 장르에 대한 문제점이 대두됐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조선 최고권위자인 세종과, 억불정책으로 천대받던 승려 신미가 합세해 훈민정음을 창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성을 위해 인물들이 뜻을 모아 문자를 만든다는 애민정신이 주제지만 여론은 지나친 고증오류로 인한 역사왜곡을 지적했다.

우선 주로 지적되는 부분은 승려 신미가 한글 창제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이다. 문종실록에 따르면 “대행왕(세종)께서 병인년(1446)부터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으셨다”라고 적혀있다. 한글 창제가 1443년에 이뤄진 후 세종이 신미의 존재를 3년이 지나서야 들었던 만큼 신미가 한글 창제에 주된 역할을 했다는 내용은 정사와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본교 국어국문학과 장경준 교수는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승려 신미가 적극적으로 관여했다고 볼 수 있는 검증된 사료는 없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철현 감독이 작년 10월 BTN 불교방송 뉴스에 출현해 “영화 시작부에 나오는 ‘훈민정음의 다양한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라는 자막을 넣고 싶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사실도 구설수에 올랐다. 아울러 조 감독이 신미에 대해 단순한 영화적 인물이 아니며 세종과 나란히 세워도 될 인물이라고 언급한 사실도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에 ‘나랏말싸미’의 해외개봉을 막아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하는 등 대중도 싸늘했다.

근육질 강제징용자? 독립투사 도둑?

사실 팩션 장르의 역사왜곡 논란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2017년에 개봉한 영화 ‘군함도’는 고증은커녕 실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된 사람들을 재현하는 과제마저 실패했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적 배경을 군함도로 설정했을 뿐 나머지 요소는 그저 액션 중심의 탈출극 영화였다는 논란이 일었다. 강제징용된 조선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다부진 체격의 연기자들이 일제를 무찌르고 대탈출을 감행하는 연출에 대한 비판이 계속됐다. 결국 네이버 네티즌 평점 5.28, 다음 네티즌 평점 6.6이라는 박한 평가를 받은 군함도는 손익분기점 800만 명에 못 미치는 658만 명으로 흥행 실패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상영을 종료했다.

군함도 이후,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은 시사회 시작부터 어색한 CG, 지나친 신파적 요소 등과 동시에 역사왜곡을 지적받으며 흔들렸다. 특히 직간접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스포츠 선수를 독립투사인 듯 묘사한 점이 관객의 공분을 샀다. 실존 인물 엄복동이 생전 자전거를 수십 대를 훔쳐 팔았던 절도 및 밀수 범죄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범죄자 미화 논란도 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해당 영화는 네이버 네티즌 평점 3.88, 다음 네티즌 평점 4.7을 받았다. 결국 엄복동은 손익분기점 400만 명의 5%에도 못 미치는 약 17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며 엄청난 적자와 함께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고증오류를 넘어선 흥행들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영화가 모두 흥행에 실패한 건 아니다. 고증오류라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좋은 성적을 거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명량’이 대표적인 예다. 우선 ‘광해’는 평가의 명암이 극명한 왕인 광해군을 다룬 영화로, ‘실제로 광해군이 두 명은 아니었을까’라는 상상에서부터 출발했다. 작중 나오는 대동법이나 호패법과 같은 정책이 논의되는 시기가 실제 역사와 다르다는 지적도 존재했다. 하지만 영화는 손익분기점인 250만 명을 훨씬 상회한 1,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광해군에 관한 대중의 이미지까지도 뒤바꿨다.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따른 ‘광해’의 전문가 평점은 7점 이상, 네티즌 평점은 8점 이상을 기록했다.

‘명량’은 배설 장군을 정사와는 다르게 전투 중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인물로 묘사하면서 배설의 후손에게 상영금지 요청을 받는 등 구설에 휘말렸다. 또 명량해전 당시에는 거북선이 없었음에도 거북선이 등장하는 연출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이나, 실제로는 없었던 선상 백병전을 묘사해 조선군 피해를 지나치게 확대했다는 왜곡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명량’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봉 당시 대중의 요구에 부응했다는 호평과 함께 천만 관객을 돌파해 현재까지 국내 상영 영화 중 관객 수 1위에 자리 잡고 있다. 관객 수는 개봉 일주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600만 명을 돌파해 총 1,700만 명에 이르렀다.

팩션, 모두를 웃음 짓게 하려면

탄탄한 역사 고증을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를 앞세워 예상 밖의 흥행을 거둔 영화도 있다. ‘박열’이 이런 영화에 속한다. 주인공인 박열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로 국내에서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는 박열의 이야기를 끌어올려 널리 알렸다. 또한 그를 유일한 영웅처럼 표현하기보단 동지들도 섬세하게 묘사해 당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박열’은 점차 잊혀가는 역사적 사건을 전달하고 묘사하는 데 초점을 뒀다는 점에서 영화적 고증의 모범사례라는 평이 일었다. 평론가 송경원은 영화에 “정면을 응시하는 성실한 시선”이라는 긍정적인 평을 남겼다.

비교적 흥행을 거두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팩션 영화의 공통점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광해’와 ‘명량’의 주인공과 핵심줄거리는 대중이 알고 있는 굳건한 역사 지식에 속했다. 두 영화는 이미 익숙한 정보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인물 설정과 상황 부여를 통해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줬다. 즉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는 충실하면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세부적인 공백에 허구를 가미해 영화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고증 논란은 발생했지만 대중에게 이미 알려진 정보에 대한 더 큰 흥미를 일으키며 흥행을 거뒀다.

반대로 ‘나랏말싸미’와 같이 관객의 배경지식 또는 역사 인식 체계에 혼란을 야기한 영화의 경우 역사왜곡이라는 대중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팩션 영화가 지녀야 할 대중성은 사실 전달과 오락성 확보의 경계에 자리한다. ‘나랏말싸미’의 경우 야사에 불과한 신미 이야기를 사실처럼 강조하는 서술방식을 택했기에 역사왜곡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한편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은 ‘군함도’와 같이 역사적 사실이 영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경우다. 저널리스트 김형석은 이를 역사의 ‘장르화’ 시도라고 설명했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택하지 않아도 강조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음에도, 흥행을 위해 역사를 이용했다는 느낌이 강할 경우 학계와 관객은 함께 공분했다.

성공적인 팩션을 위한 균형잡기

오늘날 대중은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가 제시하는 역사정보를 습득하고 그것으로부터의 자극으로 더 많은 정보를 탐색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일례로 ‘광해’의 흥행 이후 광해군의 정책이나 ‘광해군일기’와 같은 사료에 대해 더 많은 검색과 조사가 이뤄졌다. 이는 영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팩션 영화에 관객의 역사 인식 자체가 설득당하고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최근 ‘나랏말싸미’의 역사왜곡에 따라붙는 여러 우려 역시 한글 창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퍼뜨릴 수 있다는 맥락이었다. 따라서 팩션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 실재와 허구 사이에 혼동을 주기보다 역사적 사실은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행간에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팩션이라는 줄타기에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진실과 허구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풍환·권민규·김윤진 기자
98tigger@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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