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심탄회] 내일도 ‘잠깐만’을 외칠 우리에게

흔히들 우리 나이를 청춘이라 부른다. 인생에서 가장 그리워할 시기이니 소중히 여기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올해 스무 살이 된 필자 또한 이 말을 가슴에 새기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쓰리라 다짐했다. 집에서 멍하니 시간만 보낸 날에는 청춘을 낭비했다며 자책하기 일쑤였다. 시간을 쪼개 약속을 잡고 이번 주에도 바쁘냐는 엄마의 말엔 ‘젊었을 땐 노는 것도 커리어’라며 받아쳤다. 멍청했다. 국어 과외 선생이라는 껍데기까지 갖춰놓고 화자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났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대상을 가장 미뤄둔 것이다.

코로나 백신을 맞는 날이었다. 과외 시간에 맞춰서 예약을 해뒀는데 아빠는 왜 이른 아침 시간을 잡았냐고 눈도 못 뜬 채로 어린 투정을 부렸다. 미안하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엔 왠지 모를 짜증만 가득 퍼져서 심호흡을 빙자한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신 부작용은 유독 아빠에게만 나타났다. 주사는 한날한시에 같이 맞았는데 아빠만 아픈 게 그저 운이 없었거니 생각하고 또 나름의 청춘을 챙기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필자는 어김없이 놀러 나간 어린이 대공원에서 아빠의 코로나 확진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확진자가 발생하면 그의 최근 동선과 접촉자를 파악한다. 일이 끝나면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아버지는 보건소의 질문에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CCTV 확인하면 다 들킬 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반항을 했냐고 웃어넘겼지만 동네 마트가 2주간 문을 닫으면 어떻게 되는지 쯤은 필자도 알았다. 그저 아빠의 죄책감과 걱정을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확진자의 동선은 간단했다. 그 며칠 동안 들른 곳이라곤 일터와 집이 끝이었다. “죽어라 일만 했는데 코로나 걸렸다”는 아빠의 농담 섞인 탄식에 필자는 또다시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필자는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이라는 문자를 받기 전까지 굉장히 초조했다. 확진자의 동선과 달리 밀접 접촉자의 동선은 화려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밀접 접촉자만 해도 족히 열 명은 넘어갔기에 음성이라는 결과를 간절히 바랐다. 그토록 바랐던 두 글자를 본 후엔, 정신이 들었다. 그 두 글자는 지난 3일간 아빠와 얼굴을 마주 봤던 시간을 의미했다. 확진자와 3일이라는 시간을 한 집에서 보냈지만 정작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적도, 밥 한 끼를 같이 먹은 적도 없었다. 집에서 딸은 여전히 바빴고 내 나름의 청춘에서 가족은 항상 우선순위 밖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집에서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씁쓸한 웃음과 함께 ‘잠깐만요’라고 답할 것이다. 딸과의 시간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집에서 필자를 꽤 자주 부른다. 그럴 때마다 필자의 대답은 한결같다. ‘잠깐만요’. 중학생 땐 시험 끝나고 고등학생 땐 수능 끝나고 대학생 땐 종강하면 가겠노라 했던 약속이 무색하게 종강한 필자는 또 청춘을 핑계로 밖으로만 나다녔다. 그러면서 나름 알아주는 학교에 입학해 자랑스러운 자식이 됐으니 나 정도면 꽤 착한 딸이라는 오만에 빠져 살았다. 확진자 격리 시설로 향하는 아빠의 덩치가 새삼스레 작게 느껴진 밤에야 비로소 그동안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필자도 알고 있었다. 가족과 한집에서 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부모님께선 이에 꽤나 서운해하고 있다는 걸 절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쁜 일상에 매몰되다 보면 가족은 언제나 뒷전이 되기 마련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기사를 써야 한다며 방문을 열지 않고 있는 필자는 또 한 번 ‘잠깐만요’를 외쳤다. 아마 필자가 이 세상에서 자식으로 존재하는 한 ‘잠깐만’의 시간은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너무도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만큼 중요하단 의미가 아닐까. 수많은 사람이 청춘을 그리워하는 데에는 찬란한 이십 대 추억의 역할도 있겠지만 젊고 태산 같은 부모님의 기억이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윤희 기자
ddulee3880@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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