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심탄회] 버티라는 말

한숨을 쉬며 힘들다고 토로하는 이에게 사람들은 쉽게 한 마디를 툭 건넨다. 버텨라. 버티면 언젠가 끝이 온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것은 모든 역경과 고통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운 이유는 지금의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에만 있지 않다. 다시금 그 고통이 찾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자신을 옥죄는 것이다. 이번을 버텨낸다면, 그 다음은? 당장 스스로를 지켜냈다고 해서 다음에도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설사 그런다 해도 그 과정에서 어떤 불안과 고통이 있을지 너무나 잘 알기에 지켜낸다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들에게 버티라는 말은 또 하나의 가혹한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끊임없이 하는 일을 상기시켜주는 것에 불과한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버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고통에 빠뜨린 그 상처를, 그 순간을 되새기는 행위를 수반한다. 이러한 직면은 상처의 극복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유일한 과정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직면이 올바른 시기에, 올바른 방식으로 이뤄질 때의 이야기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고통 자체에 매몰된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 고통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랬어야 하는지, 그리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인지에 대한 답을 갈구하며 자책한다. 이것은 직면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는 자신을 벌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씻기를 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고통의 원인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기에 고통받는 이의 주변 사람들은 버티라는 말을 자제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의 옆에 있는 것은 그 자신도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버티라는 마법의 주문은 유혹적이다. 혹은 고통받는 이의 화살이 스스로를 겨눌 줄 모른 채 따뜻한 의도로 버틸 것을 응원할 수도 있다. 그 말은 아직 마음이 단단한 사람들에겐 효과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고통에 지친 이들에겐, 버티라는 말보다는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더욱 효과적이다. 그들은 이미 오랜 시간 버티며 자신을 벌해왔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쓸모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주변 사람의 한 마디에 살아갈 용기를 얻은 경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버티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 사람들이 있다. 성소수자는 자신의 성적 지향으로 비난받은 상처에 대해 버티라는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당했으나, 사회가 너희에게 적대적이니 어쩔 수 없다고 버티라고 얘기한다.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로 인해 차별받은 상처에 대해 버티라는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장애가 자신의 한계로 규정됐으나 아직 너희를 위한 예산도, 정책도 부족하니 참고 버티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누구보다 절실히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쏟아지는 버티라는 메시지는 따뜻한 마음을 담고 있지만 여전히 가혹하다. 이들의 고통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가 죄라는 비난이 준 상처에서 비롯한다. 이들에게 사회가 너희를 아직 못 받아들이니 어쩔 수 없이 버티라는 말은 결국 너희의 존재가 너희의 고통의 원인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 마음이 단단한 사람들, 정말로 버틸 힘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버티라는 말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사회적 소수자는 반복되는 비난과 그로 인한 고통에 지쳐있다. 이들에겐 버티라는 쉬운 한 마디보다는 너희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 어떨까. 깊은 고민 없이 위로를 던지기보다, 누구도 자신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위축되고 상처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신형목 기자
mogi2002@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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