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심탄회] 빠르지 않아도 되는 이유

통신기술의 발전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효율성에 대한 추구는 우리 사회에서 빠름 자체를 덕목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보다 빠른 컴퓨터, 빠른 민원을 요구하며 업무에서도 매분 매초를 쪼갰고, 이를 현대적이고 효율적이라 자칭했다. 느린 것은 구태와 동일시됐다. 이는 은퇴한 사람이 아닌 이상 마땅히 극복돼야 할 특성으로 여겨졌다.

필자 또한 과거 이러한 빠름의 신봉자였다. 빠른 속도가 주는 경쾌함에 매료돼 삶이든 행동이든 빠름을 유지하려 했다. 속도광처럼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과거에 대한 성찰, 그리고 빠른 판단 이후의 숙고는 다분히 부족했다.

이렇게 오만에 빠진 필자에게 과학고등학교는 하나의 벽이었다. 매사에 너무나 급했다.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급함만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과제를 잘 해결할 수가 없었다. 차분하게 문제를 구조화해야 하는데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들이대니 잘될 턱이 없었다. 결국 막힌 부분으로 돌아오니 오히려 시간이 더 걸렸다.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무작정 앉아있는 시간을 늘렸다. 하지만 제대로 된 컨디션에서 열의로 하는 공부가 아닌 이상 그것은 공허할 따름이었다.

학업에서도, 삶의 방향성에서도 큰 시련이었다. 이러한 위기는 결국 재수로 이어졌다. 1년간의 강제로 꿇어 앉혀진 시간. 처음 재수에 있어서 제일 두려웠던 것은 남들보다 1년, 혹은 그 이상을 뒤처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들은 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 필자는 기약 없이 이 곳에 갇혀서 녹슬게 된다는 게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막상 재수를 시작하고 나니 마음은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졌다. 문득 현재의 시간을 그저 보내기만 하지 말고, 잘 곱씹으며 대학 진학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자신을 성장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초반에 빨랐어도 미련이 남는다면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남는 것은 일말의 속도감과 우월감뿐. 결국 최종적인 목표의 성취는 지연된다. 그러한 성급함은 단지 자기는 노력하고 있으니 세상이 날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틀린 믿음에서 비롯된 자기 위안일 따름이었다. 미련 둘 필요가 없는 과거에 자꾸 집착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그 속에서 지독하게도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가지고 있는 필자 자신을 발견했다.

이러한 성찰의 과정에서 필자는 ‘정도 정행’, 즉 바른길이 아니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괴테의 격언은 필자의 마음을 절절하게 울렸다. 바야흐로 다시 알을 깨고 나올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자기 관조에서 나온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필자는 결국 수능이라는 긴 시험을 견딜 수 있게 됐다. 반복되는 모의고사는 이제 더는 과도한 불안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차분하게 정진하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됐고, [포레스트 검프]의 한 구절처럼, 필자는 세상과 화해하게 됐다.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에게 두려움과 불안감은 항상 곁에 있다. 그 둘은 우리에게 가끔 조용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적당히 하라고. 일단 해치우면 된다고. 넌 할 만큼 했다고. 두려움을 부정하진 말자. 이 또한 자연스러운 자신의 일부니까. 하지만 절대 굴하지도 말자. 매번 그 목소리에 따라 관성에 표류하기만 한다면, 숙고 없이 기계적으로 과거의 자신을 답습하기만 한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발전에 도달하기는 힘들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함께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진중하게 내딛자. 내디디며 후회 없이 차분하게 가보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우리 개개인이 고통은 나누고 행복은 더하며 함께 간다면 삶의 여정은 한층 더 볼거리가 많아질 것이다.

 

신재용 기자
2021150041@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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