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의 과거와 오늘

 

지난달 18일 5‧18 민주화 운동 44주년을 맞아 여러 기념행사가 진행됐다. 윤 대통령도 취임 이후 3년 연속 기념식에 참석했다. 본교 총학과 정경대학에서도 오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매년 5월 18일 광주 기행을 진행한다. 이에 광주 기행의 기원, 본교의 광주 기행 등을 The HOANS가 살펴봤다.

5‧18 민주화 항쟁은 박정희 사후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를 거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난 시민 봉기다. 비상계엄 선포에도 시위가 사그러들지 않자 신군부는 1,300여 명의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이에 더해 시위 진압 목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정예부대 7,000여 명을 추가로 꾸려 광주에 병력 총 2만여 명을 동원했다. 무자비한 살상으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는 166명으로 확인되며 행방불명된 희생자까지 고려한다면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5·18 민주항쟁은 발생 직후부터 신군부에 의해 ‘사회 불만 세력의 폭동’과 ‘공산주의자의 내란’으로 규정됐고 6월 항쟁 이전까지 국가의 철저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진실이 가려진 채 ‘5·18 폭도론’이 생산됐다. 이에 5·18 희생자와 유가족, 그리고 동조자들은 폭도 혹은 불순 집단으로 매도됐다.

광주 기행은 5‧18 민주화 항쟁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됐다. 학생사회와 재야활동가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대외적 책임감을 기반으로 기억투쟁을 전개했다. 대학가에서는 5‧18에 대한 유인물을 배포했다. 소준섭의 <광주백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유인물들은 비밀리에 대학생들에게 퍼져나가 전두환 군부독재에 대한 투쟁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광주학살을 묵인한 미국에 대한 항의성 차원에서 광주 미문화원을 방화하고 점거하는 행위 등 극단적인 행사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매년 5월 5‧18 광주 기행이 이뤄진다. 광주 기행에서는 5.18 항쟁의 주요 거점이었던 ▲전남대 정문 ▲전남도청 ▲전일빌딩 등을 돌아본다. 그러나 과거 활발했던 학생회나 연합동아리 등 자체 기구의 민주화 기억 활동에 비해 현재는 그러한 움직임이 소멸 직전 위기까지 다다랐다.

올해도 본교 총학 ‘나날’에서도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며 5.18 광주 기행을 기획했으나 참여가 저조했다. 결국 광주 기행은 총학 인권복지국 차원에서만 진행됐고 민주화운동 기념 인스타그램 참여 이벤트로 대체됐다. 정경대학 역시 5.18 광주 기행 행사에서 저조한 참여율로 인해 진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총학 인권복지국원으로 광주 기행을 다녀온 서지호(정외 24)는 “총학 인권복지국에서 광주 기행을 기획하며 연관된 동아리와 단체들에 참가 의사를 묻는 공문을 보냈지만 참여율이 매우 저조하여 기행이 무산됐고 인권복지국 소수의 인원만이 당일치기로 광주에 다녀왔다”고 밝혔다. 동시에 광주역사 기행 무산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며 앞으로 광주역사 기행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학우들이 광주 기행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며 해당 행사에 관심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며 광주 기행 적극적 참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5‧18 민주화 항쟁을 기리기 위해 매년 5월 광주 기행을 진행해 왔지만 올해는 참여율 저조로 그 규모가 축소되거나 취소됐다. 5‧18 민주화 운동 신군부의 퇴진을 외치며 민주화를 요구한 시민 봉기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그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들은 폭도로 매도돼 오랫 동안 죄인처럼 숨어야만 했다. 십수년간 숨겨져 왔던 그들을 기억으로 끄집어 내고 기리는 것은 지난날의 과오를 잊지 않고 그들의 지켜낸 가치를 이어가기 위함이다. 이제라도 이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오정태 기자

jeong3006@korea.ac.kr

박성빈·정경인·채한서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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