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그 서로 다른 정의 사이에서

작년 4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여섯 글자가 대법원 판결문에 등장했다. 이 단어는 올해 2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이하 안 전 지사)에 대한 무죄판결을 뒤집는 항소심 판결문을 포함한 각종 성범죄 판결에 인용되며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과 쟁점, 전망에 대해서 The HOANS가 훑어봤다.

intro : 안희정 성폭력 사건

 

 

지난달 9일, 대법원은 안 전 지사 성폭행 사건에 대한 상고를 기각했다. 이에 따라 ▲피감독자 간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의 징역 3년 6개월 형이 확정됐다. 기존 1심은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며 피해자가 피해 이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2심은 안 전 지사의 강제추행 1회를 제외한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1심에서 부정한 진술 신빙성을 2심에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무고의 동기가 없다는 점 등을 볼 때 인정된다고 판단해서 발생한 차이였다.

 

상고심에서 대법원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주요 내용이 일관되며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가 분명하지 않는 한 해당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판결요지를 설명했다. 이어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며 성인지 감수성을 인용했다. 성범죄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므로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피해자 진술의 증거력을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는 작년 4월 12일 권순일 대법관 주심의 대법원 판결에서 처음 거론됐다. 해당 사건의 판결문에서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문장이 처음 등장했다.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으나 핵심은 ‘성범죄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라’는 의미이다. 사법부는 성인지 감수성이 무죄추정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를 성범죄 관련사건 판결에 계속 인용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 처음 등장한 대법원 판결은 작년 4월의 성희롱 교수 해임 판결이다. 대구의 한 전문대에 재직 중이던 장 모 교수는 여학생들을 수차례 성희롱한 사실이 밝혀지자 2015년 해임됐다. 장 교수는 이에 반발하여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해임취소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장 전 교수의 해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지만,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피해자가 익명으로 이뤄진 강의평가에서 장 전 교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점 등을 들어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라고 보기 어렵다”며 장 교수 측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근거로 2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사회 전체의 평균적인 사람이 아닌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을 느낄 수 있는지”를 심리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성범죄 관련 심리에 있어서의 성인지 감수성의 존재를 처음 언급하면서 성희롱 피해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을 제시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대법원 판결문에 등장하자 비슷한 판례가 줄을 이었다. 올 8월 있었던 DVD 방 성폭행 사건 판결 역시 그 중 하나다. 해당 사건의 피고인인 김 모 씨는 2017년 12월 처음 만난 여성을 DVD 방에서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장에 섰다. 1심은 김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 재판부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원심을 파기하고 실형을 선고한 이유에 대해 2심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 관련 대법원 판례 등을 비춰 봤을 때,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복수를 약속하는 내용의 유서로 화제가 됐던 논산 성폭행 피해 부부 자살 사건도 성인지 감수성의 도입으로 하급심의 결정이 뒤집힌 대표적인 판례다. 2017년 박 모 씨는 친구의 부인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 직후 CCTV에 찍힌 피해자의 모습이 지나치게 자연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부부는 1심 판결 4개월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고려하지 않은 점은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것”이라며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파기환송했고 이후 대전고법은 박 씨에게 징역 4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평형추일까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우려는 헌법상의 두 대원칙인 증거재판주의와 무죄추정원칙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목소리로 정리할 수 있다. 증거재판주의는 합리적 의심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를 통해서만 범죄사실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죄추정원칙은 재판을 통해 범죄사실의 증명이 이뤄지기 전까지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이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선 단지 피해자 진술이 일관된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진술의 신빙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조수진 변호사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대법원은 여성이 일관성 있게 계속해서 피해를 주장하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했고, 백성규 변호사 역시 “성인지 감수성이 들어가는 내용의 판결문을 보면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유죄’ 쪽으로 판결하는 추세가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성인지 감수성은 법적 논리로서 그 개념이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특히 성인지 감수성에 근거한 사법논리는 성범죄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과 진술에 지나치게 몰입해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 혹은 피고인의 진술 모순만을 유죄 증거로 판단하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정철 변호사는 SNS를 통해 “피고인의 진술모순이나 부인진술이 유죄의 증거가 된다는 점은 무죄추정원칙을 거의 폐기하는 것”이라며 “지금껏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한 바 없음에도 대법원은 더욱더 피해자 진술을 배척하지 말라는 기준을 세워줬다”고 지적했다. 지난해부터 1년간 성인지 감수성이 언급된 판결 57건 중 56건이 유죄판결이었던 사실 역시 해당 의견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성인지 감수성 지지의 목소리 또한 높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4월의 성희롱 교수 해임 판결에 대해 “성희롱에 대한 전향적인 기준과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라고 평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불리하도록 ‘기울어진 운동장’을 맞춰 주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이어진다. 해당 용어는 현재까지 이어져 온 가해자 중심의 인식, 문화 등에서 벗어나 성범죄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인정함으로써 소위 ‘패하자다운 행동’이라는 통념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녔다. 춘천지방법원의 류영재 판사는 시사IN의 보도에서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의 진술을 재판부가 단지 통념만으로 가볍게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노정민 한국대학성평등협의회 대표는 서울지방변호사회보에 실린 칼럼에서 “우리는 피해자의 호소보다 가해자 중심 구도로 사건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며 성인지 감수성이 피해자의 권리 구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앞으로의 성인지 감수성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해 변화한 부분은 판결뿐만이 아니다.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정책 지원 역시 확대되고 있다. 국회는 올 6월 양성평등기본법 시행령 일부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올 6월을 기점으로 전국의 모든 공무원은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성희롱으로 인한 피해를 상담할 기구가 없는 국가기관에 대해 성희롱 방지조치 개선계획 제출을 의무화하는 내용 또한 개정안에 포함됐다. 이 외에도 교육부에서 학교 내 성희롱·성폭력 대응 매뉴얼을 제작해 배포하는 등 성인지 감수성 증진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실행 중에 있다. 본교의 경우 ‘인권과 성평등 교육’을 수업연한 내 학년별 1회, 재학 중 최대 4회를 이수해야 졸업 요건을 충족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은 물증도 증인도 찾기 힘든 성범죄 사건에 한정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보다 유연하게 판단하는 사법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빈틈없는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사법 영역에서 감수성이라는 주관적이고 불명확한 기준이 개입하는 부분에 대한 우려 또한 타당하다.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에 따른다는 ‘in dubio pro reo 원칙’은 국가권력이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형사소송법상 정의를 지키고 있다. 반대편에선 사회 통념에 의해 소외된 피해자를 보호하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 이 두 가지 정의 사이에서 정반합을 찾을 때 큰 의미의 사법정의는 다시금 한발짝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이풍환·장윤서·황제동 기자

98tigger@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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