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심탄회] 눈감을밖에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정지용 시인의 ‘호수1’이라는 시다. 시인은 얼굴 정도는 충분히 가릴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너무 컸던 나머지, 차마 가릴 수 없어 자신의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고 사유했다.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가리지 못해 지그시 눈을 감고, 보고 싶은 사람을 천천히 떠올려보는 시인의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 눈을 감았나, 생각해보려던 찰나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호수 같은 현실이 있었고,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교에서 회계비리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재학생과 졸업생에게 충격을 주는 일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본교의 명예를 크게 실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학생들을 위해 쓰라며 한 푼 두 푼 기부한 모든 이들의 신뢰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 기부자 중엔 일생동안 과일을 팔며 번 돈을 기부한 노부부까지 있었다. 부정부패와 불신으로 얼룩진 사회가 학문의 전당에서까지 재현되며, 부조리함에 익숙함이 다시 한번 더해지는 순간이다. 이제 대학생들은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총학생회는 회계비리를 규탄하는 월요집회를 열었다. 단과대학과 학과 차원에서도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정경대학 후문은 회계비리를 규탄하는 대자보가 여럿 붙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캠퍼스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00명도 채 모이지 못한 월요집회와, 어느덧 축제를 기대하는 게시물로만 넘쳐나는 학내 커뮤니티는 학생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음을 보여줬다. 정의와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며,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는 故 김준엽 전 총장의 말은 잊힌 지 오래다.

물론 개개인의 전투 같은 일상에 집중하느라, 공동체의 의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수도 있다. 참여하지 않는 대학생을 두고 비합리적이라 할 수도, 의식이 결여된 지식인이라 할 수도,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이기적인 개인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들이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를 훌륭히 대비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목소리를 내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회의와 번민이 생기는 일은 당연하며, 힘들지만 적응해야만 하는 사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기도 하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덩달아 무기력해지는 일은 어쩔 수 없다. 단결된 행동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외침이 공중으로 분해된 자리에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허무함만 남는다. 개인의 소심함이야 안으로 굽어 가릴 수 있지만, 집단적 소시민성은 호수만큼 커 가릴 수도 없다. 세상의 셈법에 맞춰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아쉬운 현실이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집단의 투쟁이 공동체를 바꿀 수 있다는 관념은 신화가 됐다. 회계비리 사건을 두고, 신화를 좇던 이들은 소위 운동권으로 분류되어 의문의 비난 세례를 받았다. 정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의 행진으로 치부됐다. 이제는 학생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결집력을 갖췄으며, 설사 이를 갖췄다고 한들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시인은 눈을 감고 천천히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생각했을 터이다. 눈을 감고, 시인은 보고 싶은 사람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은 눈을 감으면 더욱 막막해질 뿐이다. 그럼에도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기력할 따름이다. 그저 답이 보이길 바라며 눈을 감을 뿐이다. 호수 같은 현실 앞에, 눈 감을밖에.

임지현 기자

kujh1030@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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