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8년, 무엇을 남겼나

8년간 이어진 일본의 아베 정권이 막을 내렸다. 그가 추진한 강경하고 과감한 정책들은 자국뿐만 아니라 주변국에 큰 후폭풍을 불러왔다. 우리 국민에게는 긍정적으로 기억되기 힘들 아베의 8년을 The HOANS가 돌아봤다.

 

지난 8월 28일, 메이지 유신 이래 가장 오랜 기간 집권했던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혔다. 아베 측은 “지병이던 궤양성 대장염 재발로 인해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사임 이유를 설명했다. 아베 정권은 집권 기간이 길었던 만큼 정치색이 짙은 장기적 관점의 정책들을 제시했다. 무제한적 양적 완화와 정부지출, 구조개혁이라는 정책 기조로 취임 초기부터 실시한 경제정책 ‘아베노믹스’는 일본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으나 점차 동력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군사적 측면에서는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규모로 군비를 증강해 평화헌법을 사실상 무력화했으며, 정치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국을 도발하는 경우가 잦아 광복 이후 한일관계가 가장 악화한 시기로 꼽히기도 했다.

 

잠시간의 집권, 그리고 복귀

 

아베 신조는 1982년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고,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하며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북한에 무력 사용과 경제 제재도 불사해야 한다는 등 대북 강경책을 주장함으로써 원내 1당인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 내 인기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이 인기는 그가 2006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해 21대 총재에 당선되는 바탕이 됐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은 의회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를 맡기 때문에 아베는 자연스레 일본 제90대 총리의 자리에도 오르며 ‘전후 최연소 총리’라는 칭호를 얻었다.

1차 집권기 당시의 아베는 우익 성향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행보를 밟았다. 당시 일본의 대한·대중 관계는 전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이슈로 매우 악화한 상태였다. 아베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후진타오 전 주석과 각각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일본 총리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참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베의 1차 집권기는 자국 내 정치적 문제와 총리 본인의 건강 문제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재정운영 문제 ▲내각 내 비리 의혹 ▲내각 구성원들의 실언 등의 각종 악재로 정치적 입지가 축소된 것이다. 결국 아베가 이끌던 자민당은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총 242석 중 83석만을 확보하는 사상 최악의 성과를 거뒀다. 아베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년 9월 국회에서 ‘테러 특별조치법’이 통과하지 못하면 내각이 총사퇴하겠다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도 했으나 끝내 협상 실패와 건강 악화로 인해 며칠 뒤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공백기도 잠시, 그는 2008년 정치 활동을 재개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천황사과 요구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등 자국 내 우익 지지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후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정권 재탈환에 성공함에 따라 아베는 제96대 총리로 취임하며 2차 집권기의 시작을 알렸다.

 

다사다난했던 아베노믹스

 

아베의 재등장은 당시 일본 경제 상황의 악화와 맞물려있다. 1980년대 버블경제가 붕괴한 후 일본은 장기불황의 늪에 빠졌고 여기에다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겹치며 일본의 경상수지는 끝없이 하락했다. 당시 민주당 정권은 이런 상황에 원활히 대응하지 못했고, 아베의 자민당 정권이 뒤를 잇게 됐다. 아베 정권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아베노믹스’라 일컫는 일련의 경제정책을 시작했다. 아베노믹스는 버블경제 붕괴 후 지속한 디플레이션의 타파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 아베 정부는 “세 개의 화살”이라 불리는 세 가지 정책 기조를 제시했다.

정책의 첫 번째 표적은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한 후 그 화폐로 채권을 매입해 시중 통화량을 늘리는 양적 완화였다. 양적 완화로 시중에 엔화가 많이 공급되면 유동성이 높아지고 엔화의 가치는 떨어진다. 이는 해외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 상승으로 이어져 수출이 늘어나는 결과를 낳는다. 아베노믹스는 이런 유동성 공급으로 투자와 소비를 유도해 국내 경기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다음으로는 정부지출을 확대하려 했다. 엔화의 높은 신용도는 일본 정부가 부채를 대규모로 늘리는 것을 가능케 했다. 이를 이용해 향후 10년간 200조 엔의 추경예산을 편성하며 국가 차원의 각종 투자를 강화하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구상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규제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 대규모 규제 완화를 통해 국가경제특구를 지정하고 여성·노인·외국인 노동자 인력 활용을 확대하면서 노동 및 소비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아베노믹스는 실제로 일본 증시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 지수는 2013년 5월 아베노믹스 시행 이후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또한 지난 20년 내내 일본이 겪어왔던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고 현재도 1% 부근의 물가상승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베노믹스는 현재 명확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수출시장에서 자국 상품의 가격 경쟁력 상승을 이끈 엔화의 가치하락은 동시에 수입 물가도 급등하는 결과를 낳아 일반 국민의 생활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또한 국민연금이나 이자소득으로 살아가는 일본의 고령층들은 아베노믹스로 물가가 상승하자 큰 피해를 보게 됐다. 게다가 안정적으로 운용되던 일본 국채가격이 아베노믹스로 인해 하락하면서 주식시장이 불안해졌다. 특히 2016년 브렉시트가 실현되며 유럽의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주목받았고, 엔화 가치가 급상승함에 따라 엔저(低)를 목표로 하던 아베노믹스를 더욱 거세게 뒤흔들었다.

아베노믹스는 주변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으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해 오는 업계는 제품 생산 원가를 절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일본과 주요 수출 품목이 많이 겹치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자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베노믹스를 용인하던 미국도 자국의 경제 성장이 느려지자 2015년 말부터 일본의 환율 조정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베의 꿈, 군대보유국 일본

 

아베는 2006년 1차 내각 출범부터 평화헌법 폐기와 자위대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 일본국 헌법 제9조를 포함한 평화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에 따라 일본은 정식 군대를 보유할 수 없으며 교전권을 행사할 수도 없다.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등 일본의 우파 세력은 ‘이 조항은 점령군이었던 미군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일본이 주권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됐다’며 강하게 불만을 표출해왔다. 아베 또한 “침략에 대한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위안부가 강제동원됐다는 근거는 없다”는 등의 발언을 통해 일본 내 우파의 역사수정주의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낸 바 있다. 현재 세계 5위권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본래 자위대는 타국에 대한 침공이 불가능하고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국 방어만 가능한 ‘반쪽짜리 군대’다. 아베는 자위대의 정식 군대화와 더불어 ‘전쟁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아오는 것이 일본이 다시 보통국가로 발돋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평화헌법의 폐기, 적어도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런 개헌론에 대해 일본 국민은 반평화적·군국주의적인 발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따라 아베 정권은 정치적 부담이 큰 개헌을 곧바로 시도하기보다는 헌법을 우회해 자위대의 권한과 실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대표적으로 아베 정부는 2014년 ‘일본이 주권국으로서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자국의 공격으로 간주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을 보유하고 있지만 행사할 수 없다’는 정부의 기존 헌법 해석을 뒤집었다. 이를 통해 자국이 공격받았을 때 최소한도로 방어한다는 전수방위 원칙이 사실상 무력화됐다. 다음 해 자민당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거센 반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동맹국의 요청이 있을 시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게 하는 집단적 자위권의 개념을 포함한 ‘평화안전법제정비법’ 외 1개 법을 통과시켰다. 국회에 출석한 3명의 헌법학자가 해당 법안이 헌법 제9조 위반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음에도 수적 우세를 통해 자위대의 활동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아베는 사퇴 의사를 밝히고 차기 총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자위대 강화를 위한 절차를 진행해나갔다. 지난달 11일 아베는 적 기지 공격 능력 확보를 포함한 안전보장정책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 또한 자위권의 일종으로 헌법 제9조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일본 국민과 한·중 등 주변국은 이것이 실질적으로 선제타격 능력에 해당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아베는 자위대의 실질적 규모 면에서도 연간 방위비를 GDP 1% 내로 유지하던 ‘1% 룰’을 깰 것을 2017년 공식화하고 계속해서 군비를 확장했다. 금년도 방위예산은 5조 3,222억 엔으로 작년도 대비 무려 6.3% 증가했다. 전자전 부대, 우주 감시 능력 등의 확보도 이루어지며 자위대의 규모와 전력은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파국으로 치달은 한일관계

 

아베 정권의 대외정책은 강한 친미 성향과 반북·반중 성향이라는 대전제 아래 이뤄졌다. 한국은 군사 협력을 바탕으로 설계된 한·미·일 공조를 유지하기 위해 협력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한미일 공조의 핵심 파트너인 미국과는 임기 내내 좋은 관계를 유지한 데 반해, 계속되는 우경화 행보를 걸으며 한일관계가 파국에 이르는 원인을 제공했다.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며 시작된 아베 내각의 재무장 또한 대전제에 부합하는 결정이었다. 아베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자신의 외조부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절친했던 관계를 언급하며 한일관계의 완화를 바란다는 발언을 했으나 행동은 달랐다. 그는 2013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2014년 헌법 개정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하며 우경화 정책을 펼쳤다. 이에 박근혜 정부는 중국 정부와 자위권 허용에 대한 반발 성명을 동시에 발표하는 등 반일감정을 공유하며 전략적으로 협력했다. 2015년 중국에서 실시된 전승절 행사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강화된 한중 관계를 증명한 사례다. 그러던 중 2015년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는 경색된 관계를 유지해온 한일 양국 정부가 타결한 기념비적 합의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롯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체결된 졸속 합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아베 내각은 역사 교과서에 위안부와 강제노역 문제의 서술 삭제를 허용하는 등 역사 왜곡을 지속하며 박근혜 정부와 불협화음을 빚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출범 이후에도 아베 내각은 우경화 행보를 이어가며 한일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또한 이에 맞서 2017년 위안부 합의 재협상을 위해 TF를 출범시키는 등 대일 강경 노선에 앞장섰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신일본제철에 강제징용자들에 대해 배상할 것을 판결한 사건은 한일관계가 파국에 다다른 결정적인 계기였다. 일본 정부는 해당 판결에 반발하며 다음 해 7월 한국으로의 공업 소재 수출을 규제하고 8월에는 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한국 정부 또한 이를 보복성 결정으로 규정하고 백색 국가에서 일본을 제외하는 등의 정책으로 맞불을 놓으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동년 8월 22일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연장 거부로 한일관계는 최악에 이르렀다. 미국의 반발 등 여러 외교적 어려움을 고려해 11월 지소미아가 연장되고 수출 규제 역시 완화됐지만, 한일관계는 아베의 퇴임 시점까지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北·中과의 관계, 미완의 숙제로 남다

 

아베 정권은 북한과 중국에 더욱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작년 7월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대북 제재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음을 수출 규제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다. 아베는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가 강제노역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처럼 북한에 대한 무역관리도 제대로 지키지 않을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아베 본인은 북한에 대한 반감을 끊임없이 표출했지만, 그와 별개로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대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취임 첫해 이지마 이사오 내각관방 참여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이후에도 김 위원장과 조건 없이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해왔다. 그러나 그가 대화를 시도한 이유는 납북자 송환 문제에 대한 자국 내 정치적 압박에 등 떠밀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아베는 납북자 송환에 실패한 채 사임했고, 퇴임 기자회견에서 이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중일 관계 역시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일본이 실효 지배 중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두고 양국 간 영토분쟁이 현재도 진행 중이다. 중국은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넘겨주기 전까지 일본으로의 희토류 수출을 막겠다는 등의 경제적 조치로 일본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아베의 지속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또한 양국의 갈등을 유발한 요인에 속한다. 그러나 2018년을 기점으로 양국은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아베는 중일 평화우호조약 발효 40주년인 재작년 10월 중국을 방문하고 500여 명의 대규모 경제 사절단을 파견하며 중일 관계 개선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외교적 움직임은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 한계가 존재했다.

 

성공가도 아베를 가로막은 사건들

 

아베가 이끄는 자민당이 전국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당내 정치에서도 친(親)아베 파벌이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며 아베의 앞에는 평화헌법 개정과 보통국가화라는 원대한 꿈으로의 탄탄대로가 놓인 듯했다. 그러나 50%에 달하던 지지율은 모리모토 학원과 가케 학원 문제, 일명 ‘사학 스캔들’이 불거지며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아베의 위기가 찾아왔다. 두 스캔들 모두 아베 지인의 사학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으로 각각 국유지 헐값 매각, 수의학부 특혜 신설의 문제가 얽혀있다. 이로 인해 2017년 7월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자민당은 패배의 쓴맛을 느껴야 했다. ‘벚꽃을 보는 모임’ 의혹도 이미 취약해지기 시작한 아베의 정치적 입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해당 모임은 총리가 주최하는 공공행사로 정부 예산이 사용되는데, 아베가 이 모임을 자신의 지지자와 지인을 위해 사용했다는 의혹이 2019년 제기됐다.

이 논란들 자체가 아베의 정치적 성향이나 정책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라는 점에서 안보법제 통과 당시의 지지율 급락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게다가 의혹이 제기된 후 처리 과정에서 은폐 의혹과 더불어, 관료가 상급자를 위해 자의적으로 위·편법을 자행하는 소위 손타쿠(そんたく) 문화가 드러나며 비난이 더욱 거세졌다. 급락한 지지율은 이후 한일 간 무역분쟁, 초계기 위협비행 등 국민을 결집할 수 있는 이슈의 발생으로 일부 회복됐지만 코로나19의 확산이 또 한 번 지지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태 초기 의료 체계 붕괴 위험을 이유로 적극적인 검사 정책을 반대하고, ‘아베노마스크’로 대변되는 마스크 수급 문제가 야기되는 등 일본 정부의 안이한 대응은 일본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이어지며 지난 7월 일본 마이니치신문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2%로 추락하는 등 아베 정권에 명백한 위기가 찾아왔다.

 

스가의 달라진 일본?

 

지난 8월 28일 아베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힌 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자민당 내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일본 제99대 총리로 새롭게 취임했다. 스가 신임 총리는 당내 주요파벌들의 지지를 확보해,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큰 지지를 받았음에도 당내 입지가 약했던 온건파 이시바 시게루를 꺾고 총재에 선출됐다. 일부 전문가들은 스가 총리가 아베와 비교해 이념을 덜 내세우는 실용파에 속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한일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쳤다. 그러나 스가 총리가 후보 토론회에서 아베의 외교정책을 훌륭하게 평가하고 출마 기자회견에서는 아베의 정책 계승을 강조했다는 점에 비춰 한일관계가 쉽게 재정립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 또한 대두된다.

아베의 2차 집권기 시기 한일관계는 광복 이후 가장 험악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베 내각은 과거사에 대한 최소한의 유감 표명도 없이 한국에 대해 경제보복을 단행하며 최악의 한일관계를 형성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였으나 이제는 너무도 멀어진 일본이 스가 총리의 등장 이후 어떠한 행보를 보일지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박찬웅·김원겸·김준범·신형목 기자

pcw0404@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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