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後門] 사랑을 사유하라

Are you alone?
우린 지금 연락해야 해
서로의 안부를 챙겨주며,
복잡한 얘길 들어주면 돼

-10cm,〈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가사에 나온 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개인주의와 결과주의가 가득한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 속의 온기를 갈구한다. 그러나 시시각각 덮쳐오는 외로움을 편리하게 해소하기 위해 한쪽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간주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객체로 설정하는 것은 그의 고유성이나 자율성을 묵시하는 행동이다. 이런 무지성의 사랑은 ‘폭력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띤다.

폭력적인 사랑은 상대를 사랑의 객체로 간주하고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사랑이다. 이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부재한 관계다. 강요는 조율과는 다르다. 조율은 타인과 내가 상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인지한 후 하나하나 맞춰감을 의미한다. 이와 대조되는 강요의 사랑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스토킹 범죄 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범죄로 이어질 만큼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존중이 없는 사랑은 그저 감정을 소모하는 사랑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필자에게는 틈만 나면 우울감을 호소하던 친구가 있었다. 사정이 안쓰러워 받아주었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옮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 친구를 놓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네가 있어서 너무 좋다”, “사랑해”와 같은 표현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마음이 닳았고 결국 구질구질하게 다툰 끝에 절연했다. 머리가 크고 생각해보니 나는 그에게 사랑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철저한 객체였다.

반대로 자신을 사랑의 객체로 설정해도 온전한 사랑은 힘들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자주 괴롭힌다. 톨스토이의〈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수동적인 사랑의 문제점을 잘 그려냈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명석한 두뇌로 판사 자리에 올랐으며 흠 없는 행실로 주위의 인정을 받아왔으나 그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과 감정을 소모한다. 이윽고 그가 시한부 판정을 받자 이반 일리치의 돈과 권력에만 관심 있었던 그의 가족과 주변인은 곧바로 등을 돌린다. 진정한 애도조차 없는 그의 장례식은 눈물 날만큼 비참하다. 사랑받기 위해 아등바등 애쓴 그의 인간관계는 마치 종이로 만든 집과 같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행위는 거절당할 위험을 감수한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서로의 자아를 지키면서 사랑을 피우려면 ‘사랑하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한다. 이런 능동적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사랑의 기술〉에서 찾아봤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다”. 프롬이 묘사한 능동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이 문장은 ▲보호 ▲책임 ▲지식이라는 사랑의 3요소를 시사한다. 그러나 프롬에 의하면 3요소가 갖추어진 사랑이라도 ‘존경’이 없다면 폭력적인 사랑으로 변모한다. 그는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한다”며 존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숙한 사랑은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프롬은 그 상태를 ‘두 존재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있는 역설’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분리’라는 원초적 불안에서 상대를 구제하는 동시에 상대에게 구제된다. 그러나 순간의 쾌락만을 좇는다면 사랑은 한순간에 타락할 수 있다. 본능만을 좇지 않으려면 사랑을 사유하는 자세부터 가져야 한다. 사랑에 대해 다시금 성찰함으로써 그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서로에게 어둠 속 등불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박예나 기자
june23107@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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