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잊힌 학생운동을 위한 기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그 연원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은 인지도가 높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의 본원 격인 조선시대 학생운동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이해 The HOANS에서는 학생운동의 연원을 좇아 조선시대의 학생운동 양상과 그 시사점을 알아봤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잊힌 조선시대 학생운동

  한국에는 8.15 광복절 등 여러 기념일이 존재한다. 그중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학생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 및 발전시켜 소명 의식을 고취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알리고자 지정된 기념일이다. 처음 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1953년으로 ‘학생의 날’이라는 명칭이었지만 2006년부터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유래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 간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계기로 시작해 전국으로 퍼졌으며 3.1 운동 이후 최대의 학생 항일운동이 됐다.

  3.1 운동, 6.10 만세 운동 등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은 교육 과정 속에서 역사 교과서를 통해 많이 접할 수 있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학생운동은 교과서나 매체 등에서 잘 다뤄지지 않아 조선시대에도 학생운동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의 지식인 계급이었던 유생들이 불의에 저항하는 모습은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의 본류라고 볼 수 있다. 유생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의사를 피력하고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유생들, 대의(大義)를 위한 운동

  조선시대 학생운동의 방식은 지금과 달랐다. 먼저 성균관 내 유생들의 자치기구 ‘재회’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학생운동이 필요한지 심의했다. 보통 회장과 임원들로 구성된 재회는 주로 유생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심의에서 그 필요성이 인정된 경우 유생들은 ▲유소(儒疏) ▲권당(捲堂) ▲공재(空齋) ▲공관(空館)의 4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피력했다. 먼저 유소란 어떤 사안에 관하여 유생들의 의견을 담고 연서명한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리는 방법이다. 유소는 비교적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위 방식이었으며 성리학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의견을 표출하는 의도로 작성됐다. 일례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이하 국편위 실록 국역본)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1월 3일 자에는 이조참판 정언지가 역적의 9촌이라는 이유로 유소가 작성됐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유소보다 심화된 방법인 권당은 식당에 들어가지 않으며 항의하는 것이었다. ‘권당’의 양상은 대표적으로 ‘청맹권당(靑盲捲堂)’과 ‘호곡권당(號哭捲堂)’ 두 가지가 있다. 청맹(靑盲)이란 겉으로는 맑은 눈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수업을 받지 않고 장님인 척 행동하는 유생들의 시위였다. 이보다 조금 더 심화한 형태의 권당이 호곡권당이다. 호곡은 목 놓아 슬피 운다는 뜻으로 곡소리를 내며 대궐까지 걸어가는 유생들의 항의 행동이었다. 이와 관련해 국편위 실록 국역본 『효종실록』 4권, 효종 1년 7월 3일자에는 권당을 행했던 사람들의 일부가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공재(空齋)는 기숙사를 나가는 것으로 권당이 통하지 않을 경우 선택됐다.

  공관은 수업을 받지 않고 단체로 성균관을 비워버리는 것으로 최후의 수단이었다. 공관의 대표적인 예시는 국편위 실록 국역본 『세종실록』 121권, 세종 30년 7월 23일 자에 서술돼있다. 세종 30년에 이전했던 불당(佛堂)을 궁내에 재설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이에 반발한 유생들이 집단으로 공관을 실시했다. 세종은 유생들을 다시 성균관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영의정 황희와 의논했고 결국 황희가 유생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해 공관 상황은 일단락됐다.

조선시대 권당의 변천사(變遷史)

  권당은 조선시대 학생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발생했으나 조선 전기에는 권당을 하면 처벌받기도 했다. 국편위 실록 국역본『성종실록』32권, 성종 4년 7월 5일자에는 성균관 유생 임지 등이 스승에 대항하다가 몇몇 동료들과 권당을 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임지는 곤장 60대에 더해 징역 1년이라는 중형을 받았으며 동료들도 이에 준하는 형벌을 받고 영구히 과거를 칠 수 없게 됐다.

  국왕의 힘이 강해 권당이 비교적 발생하지 않았던 조선 전기와 달리 조선 중기로 넘어가면서 당쟁의 격화로 권당이 잦아지고 과격한 시위도 발생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사례는 중종 14년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하옥에 관한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선왕조실록 전문사전에 따르면 기묘사화 발생 당시 성균관 유생 박광우는 이약수와 함께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을 이끌고 대궐로 쳐들어가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체포를 항의하며 호곡했다. 유생들은 궁궐을 지키던 군사들에게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울부짖으며 조광조 세력을 구원하기 위한 글을 올렸다. 그러나 10여 통의 글을 중종에게 바쳤음에도 효과는 없었고 결국 이약수 무리는 체포됐다. 또한 국편위 실록 국역본『현종실록』8권에 의하면 현종 5년 유생들이 재실을 지키는 것이 허술하다는 꾸지람을 듣자 식당에 참석하지 않았다. 학문에 대한 태도가 소홀하다고 꾸짖자 권당을 진행한 셈이다.

  권당이 자주 발생하자 조선후기부터는 권당이 그 본질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숙종과 영조 때 권당이 유난히 많이 발생했는데 이는 당쟁에서 권당이 정치적으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성균관 유생들의 정치개입은 엄격히 금지됐지만 붕당들은 서로의 집권 세력을 압박하기 위해 권당을 활용했다. 유생들이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자 당쟁이 더욱 심화됐다. 국편위 실록 국역본『경종실록』2권에 따르면 경종 즉위년 9월 11일에는 급기야 성균관 유생들이 윤지술을 정배시켰다는 이유로 권당하기에 이르렀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유배됐다는 이유로 권당한 것이다. 이로 인해 왕은 윤지술에 대한 정배의 명을 물렀다. 결국 조선 후기의 권당은 학생운동으로서의 제 기능을 수행하기보다는 당쟁과 정치에 이용돼 국가에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변모했다.

조선시대의 학생들, 지(誌)

  조선시대는 절대군주정으로 왕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왕이 유교적인 관점에서 성균관 유생들의 의견도 중시했으므로 그들의 시위를 중대히 여긴다 해도 왕의 말 한마디가 멸족의 권한을 지니는 구조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유생들은 국책이 잘못됐다면 그들의 의견을 피력했다. 시위가 발생하면 왕은 비판받은 명령을 재고하며 명을 물리거나, 진행한다 해도 비판점을 반영했다. 게다가 과거에는 임금이 모든 상소문을 읽고 직접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정치체제가 달라졌다고 해도 당시의 학생운동이 시사하는 바는 여전히 존재한다. 정치의 권한이 왕이 아닌 정부에 있는 지금, 정부는 정치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소통의 장을 확충할 의무를 갖는다. 이에 더해 국민청원 게시판을 넘어 다원화된 의견이나 비판을 듣고 정책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된다.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의 날과 이전부터 이어진 학생들의 시위는 정부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해지는 현 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현대사회의 치열한 취업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이 오랜 기록(記錄)과 적극적 정치 참여를 기억하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냈던 과거를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실의 짐으로 인해 잊힌 학생들의 외침이 다시 한 번 ‘우리의 목소리’로 기억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을 기다린다.
유효민·고성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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