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심탄회] 마음의 소리

곧 1주기를 맞는 코로나19 사태로 침대와 한 몸이 되는 시간이 길어졌다. 수능이라는 벽을 넘은 후 부지런할 이유를 잃고 나태한 채로 책보다는 핸드폰을 가까이했다. 보고 싶었던 각종 드라마와 영화들도 섭렵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인생영화라며 ‘Call me by your name(그해, 여름 손님)’을 추천해줘 잔뜩 기대하며 시작 버튼을 눌렀다. 한여름 엘리오와 올리버라는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퀴어(queer)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당혹스러웠다. 영화 내용 때문이 아니라 동성애 장면을 볼 때 마음 한 구석에서 묘하게 불편함을 느끼는 나 자신이 당혹스러웠다. 영화 초반엔 이런 장르가 처음이어서 그럴 것이라고 믿었으나 두세 번이 넘어가도 마음은 똑같았다. 추천해준 친구가 인생영화라고 말했던 걸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화 도중 LGBT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항상 그들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친한 친구가 고등학교 때 커밍아웃을 했을 때도 그를 응원하며, 이 친구를 존중해주지 못하는 일부 반 아이들을 같이 욕해주기도 했다. 나아가 이들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개방적이지 못하다고 내심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처음 보는 내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영화가 끝난 후 불을 끄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오랫동안 생각했다.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개방적이고 중립적인 척하며 위선을 떨었던 게 아닐까 고민했다. 답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은연중에 주위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고 있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나의 것은 동성애에 대한 가치관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했던 동기도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다. 고등학교 입학 후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직업을 좇아 3년을 달렸다. 그동안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행복은 진심에서 출발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보다는 주변에 집중하며 살고 있던 것이다. 길고 긴 새벽 동안 이리저리 뒤척이며 나를 깊게 이해하고 앞으로의 인생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떠올렸다. 그리고 다음날 부모님께 진로를 바꾸고 싶다고 바로 말했고 어머니는 매우 놀라시며 나를 회유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입학 원서 쓰기 전 약 한 달 간 매일 나의 진로에 대해 토론했고 결국은 3년 내내 준비하던 대학과는 전혀 다른 곳에 도전했다.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는, 진짜 내 인생에서의 첫 걸음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Call me by your name’을 봤던 새벽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성찰이라는 것을 시작했던 때였다. 많은 생각들로 밤을 지새우고 아직 깨어있다는 친구의 말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 모든 생각을 털어놓았다. 가장 친한 친구조차 나의 이런 모습을 전혀 몰랐다며 놀라워했고 꽤 오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대학입시라는 큰 산을 넘기 전 나에게 이 영화를 추천해준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의 말을 전했다. 이 영화로 인해 마음의 소리를 듣고 이를 우선시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으니, 친구가 말했던 인생영화와는 다른 의미로 나의 ‘인생을 바꾼 영화’가 되었다. 영화 한 편이 잔잔하던 일상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일상의 변화를 넘어 누군가의 인생에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것이 바로 ‘인생영화’가 아닐까.

 

최혜지 기자

chj0418@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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