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1987년 6월, 우리나라는 실질적인 민주국가로 발돋움했다. 학생과 종교인을 모두 아우르는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민의 권리를 요구한 결과였다. 6월항쟁 33주년을 맞아 The HOANS가 서울을 누비며 그날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돌아왔다. 6월은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자 호국보훈의 달이기도 하며, 대학생들에게는 기말고사를 대비해 책상 앞에 앉아야 하는 달이다. 동시에 6월은 6월항쟁을 통해 대한민국에 민주화라는 선물을 선사한 달이기도 하다. 올해로 33주년을 맞은 6월항쟁을 기념할 방법을 고민한 끝에 6월항쟁 당시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장소들을 찾아가 보는 르포 기사를 기획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취재 전날 정부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수도권 공공시설 운영 중지 조치’를 발표하며 취재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결국 기념관을 중심으로 했던 계획을 급하게 수정해 실외 장소를 중점적으로 취재했다. ‘코로나19가 또 발목을 잡는구나’라는 아쉬움을 안고 남영동과 신촌, 서울 도심을 거닐며 민주화를 꿈꿨던 평범한 시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남영동 – 학생의 죽음, 불씨의 탄생

6월항쟁의 주요 사건이 진행된 순서로 취재를 진행했기에 용산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을 취재의 첫 장소로 선정했다. 비록 운영 중지 조치로 인해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6월항쟁을 소개하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해 외부에서라도 둘러보게 됐다. 민주인권기념관을 생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새롭게 조성한 공간이며, 6월항쟁의 시발점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1976년 신축된 이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기자협회 집단구속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보도지침 사건 등 민주화 운동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거쳐 가며 수많은 학생과 민주화 인사, 시민이 불법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 온갖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그러던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가 경찰에 연행돼 이곳에서 고문을 받던 중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박종철의 사망 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며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으나 언론의 보도가 잇따르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며 전 국민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6월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두운 톤의 붉은 벽돌로 장식된 외관 때문인지, 그곳에 서린 아픈 역사 때문인지 우중충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회색 콘크리트 담벼락은 아직도 철조망으로 감겨있어 대공분실 당시의 폐쇄성과 은밀함을 드러냈다. 고문실이 위치한 5층에는 고문을 은폐하고 피해자들의 투신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의 아주 조그마한 창문들이 위치했다. 민주인권기념관은 2022년 정식으로 개관한다.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담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주길 바라며 발길을 돌렸다.

 

신촌 – 스러진, 그러나 기억될

남영동에서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로 향했다. 이한열 열사가 1987년 6월 9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안타깝게 사망한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6월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연세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 열사의 발자취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캠퍼스 정문 앞 바닥에는 ‘이한열 피격 현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동판이 자리했고, 캠퍼스 중심부인 백주년기념관 왼편에는 이한열 동산이 조성돼 있었다. 무엇보다 연세대 학생들의 마음속에 이 열사의 역사가 남아있었다. 캠퍼스를 둘러보던 중 중앙도서관 앞에서 만난 재학생 류현성 씨는 이 열사에 대해 “연세대 학생이기 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이 열사를 항상 존경하며 내가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류 씨처럼 이 열사를 기억하는 학생들의 마음이 모여, 연세대는 작년부터 학교 차원에서 이 열사의 추모식을 공식행사로 개최하며 그 희생을 기억하고 있다.

 

명동 – 여러 믿음, 하나의 마음

다음으로는 6월항쟁의 분기점을 마련하고 당시 시민들의 보호막이 돼주었던 명동성당으로 발길을 향했다. 명동성당은 ▲1987년 1월 26일 김수환 추기경이 미사 강론에서 박종철 열사를 언급한 데 이어 ▲같은 해 5월 18일 광주 민주항쟁 7주기와 박종철 군 추모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조작을 폭로하고 ▲6월항쟁 당시 농성자들을 지켜줬던 장소다. 당시 명동성당을 필두로 한 천주교 외에도 불교, 개신교 등 다양한 종교단체가 민주화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며 범국민적인 민주화 열망을 드러낸 바 있다.

명동성당을 돌아보다 만난 강진성 씨는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의 기여에 대해 놀라움을 드러냈다. 짧은 대화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전해 들은 강 씨는 “종교단체들이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6월항쟁에도 동참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됐다”며 “명동성당에 와서 당시의 시민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명동성당이 한국 천주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민주화의 성지라는 사실이 더욱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게 됐던 순간이었다.

 

시청 – 그들이 꿈꿨던 세상

취재의 마지막 장소는 서울광장으로 선정했다. 이곳은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이 열린 곳이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이 6·29선언을 발표한 지 열흘 뒤로, 완전한 민주화를 열망한 시민과 학생 100만여 명이 운집해 시위를 벌였다. 약 반년 뒤인 12월 16일, 16년 만에 직선제 방식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며 군사독재는 막을 내렸다.

코로나19로 인해 집회 금지명령이 내려지며 지금은 한산한 모습을 보이지만 33년 전 그날 이후 광장은 언제나 붐볐다. 다양한 이익집단과 사회적 약자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드높였으며, 결집한 국민의 힘은 여러 지도자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했다. 광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금,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어느 정도는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아직 부족한 면이 종종 보인다. 1987년의 그들이 꿈꿨던 세상과 2020년의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나갈지는 전적으로 우리 세대의 몫이라는 책임감과 함께 취재를 마무리했다.

 

 

박찬웅·황제동 기자
pcw0404@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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