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광장] 영화 <인어공주>, 원작도 PC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지난달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뮤지컬 영화 <인어공주>가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개봉했다. 어느 쪽으로든 화제가 된 것은 이번 영화의 캐스팅이었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1989년 애니메이션 속 인어공주 ‘에리얼’의 모습이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던 만큼 배우 할리 베일리를 ‘에리얼’ 역할로 발탁한 것에 대한 갑론을박이 공개 직후부터 개봉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에서 배우가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됐는가? 혹은 원작이 존재한다고 해서 별개의 작품 속 같은 캐릭터가 외형적으로 같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게 <인어공주> 캐스팅 논란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약자인 PC 논쟁으로 변모하면서 2019년부터 우리 곁을 떠돌았다.

이 PC 논쟁은 ‘에리얼’이 원작에서 빨강 머리 백인이었다면 원작과 그 팬들을 존중해 외형을 리메이크에서도 살리는 것이 적절한지, 디즈니에 흑인 공주가 적으니 흑인 아이들을 위해 인종 설정에서 자유로운 인어 캐릭터 ‘에리얼’을 흑인으로 바꾸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것이다. 그럼 ‘에리얼’을 말하기 전에 참고할 만한 다른 사례는 없을까? 시대가 바뀌면서 사회적 편견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럽다. 당연히 원작과 리메이크 작품 사이의 시대적 흐름 변화 때문에 불거진 오늘날의 논쟁이 <인어공주> 캐스팅 논란만은 아니다.

올해 초 영국 아동문학 거장인 로알드 달의 작품에 대한 출판사의 단어 수정도 언론을 달구는 논쟁거리였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출판사가 1964년 <찰리와 초콜릿 공장>, 1988년 <마틸다> 등 달의 소설 속 단어 표현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는다며 재출간을 앞두고 단어 수백 개를 요즘 인식에 맞게 고쳤다고 보도했다. ‘뚱뚱한(fat)’은 ‘거대한(enormous)’으로, ‘쪼끄만(tiny)’은 ‘작은(small)’으로 바뀌고 ‘검다(black)’와 ‘하얗다(white)’는 표현은 다수 사라졌다. 남성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을 좋아하던 ‘마틸다’는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팬이 됐다.

출판사의 단어 수정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이 같은 수정을 업데이트로 본다. 애슐리 에스퀘다 대중문화 평론가는 “시간과 함께 진화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다른 이들이 함께 갇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지겹다”고 평가했다. 출판사 또한 “재출판 때 작품의 언어를 검토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면서 단어 수정의 합당함을 주장했다. 반면 단어 수정을 반대하는 쪽은 이런 수정이 표현의 자유에 반하는 검열이라고 외친다.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는 터무니없는 검열을 한 출판사와 저작권 관리 업체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에도 각계에서 논란이 잦아들지 않자, 영국 총리실까지 가세해 “픽션 작업은 보존돼야 하며 에어브러시로 지워버려선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놨다. 결국 출판사는 개정판과 함께 원본도 계속 출간하는 제3의 방안을 마련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말고도 이안 플레밍의 <카지노 로얄>을 포함한 007 시리즈 등 과거에 발표된 작품들이 출판사의 단어 수정을 거쳐 재출간된다는 소식이 연달아 들려오면서 PC 논쟁은 영국을 비롯해 세계에서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양쪽의 주장 모두 그럴듯하다고 보더라도 당시의 편견을 그대로 품고 있는 소설을 현시대에 즐기기 위한 많은 방법 중 실현 가능한 방법이 단어 수정과 재출간만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표현이 들어간 예술 작품은 오늘날 독자가 읽기에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예술가 본인이 아닌 자가 작품의 일부분을 소급해 지우려고 하는 것은 그 작품 전체를 훼손하는 것이자 누구에게나 주어진 표현의 자유를 불분명한 잣대에 의해 예술가로부터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인어공주> 캐스팅 논란을 적용하면 맨 처음 인어공주가 19세기의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이 만들어 낸 “심해처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인물이고 그래서 애니메이션에서 백인으로 묘사해 뒀음에도 실사화 단계에서 ‘에리얼’의 인종을 바꾼 이유가 시대적 흐름 반영이었다는 점에서 <인어공주>는 자가 검열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 시리즈에서 월트 디즈니 픽처스 창립 이래 99년 동안 주인공 캐릭터가 백인에서 인종 변경된 것은 올해 개봉한 <인어공주>가 최초이고 두 번째는 라틴계 미국인 배우를 캐스팅한 <백설공주>로 아직 포스터 한 장 공개되지 않은 영화다. 그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빨강 머리 ‘에리얼’을 지우고 그를 흑인 캐릭터로 바꾸겠다는 것은 알쏭달쏭하다.

물론 <인어공주>는 일부 수정 뒤 같은 형식으로 그대로 다시 내놓는 게 아니라 소설에서 영화로, 애니메이션에서 실사화를 거친 형태로 리메이크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올해 재출간된 개정판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같지는 않다. 재해석의 범위가 매우 넓어지고, 원작과 크게 달라져도 그 작품만의 완결성과 독창성을 보여준다면 원작 훼손이 아니라 또 다른 훌륭한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리 베일리의 <인어공주>를 지지하는 입장이더라도 디즈니의 행보는 부정적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디즈니는 재해석을 통해 발굴해 낸 <인어공주> 이야기가 현시대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지 보여주는 대신 무작정 관객을 인종차별로 몰아붙이기로 선택했다. 디즈니는 <인어공주> 캐스팅 논란이 일자 ‘에리얼’이 인간이 아닌 인어라는 점을 강조함과 동시에 “덴마크인 인어공주가 흑인인 것이 가능하고, 이는 덴마크인 흑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번 <인어공주>의 예고편에 등장하는 옷차림이나 배경은 먼 옛날을 떠올리게 하고,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카리브해 일대는 19세기에 법적으로 노예무역을 금지하기 직전까지 ▲아프리카 ▲유럽 열강 ▲아메리카 대륙 삼각 노예무역의 요충지였다.

제국주의와 노예 제도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않던 시절로 거침없이 파고든 디즈니는 빨강 머리 ‘에리얼’을 지우려다가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죽어간 식민지 흑인들의 고난을 지우고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수없이 불붙었던 흑인 인권 운동과 그 맥락까지 지워버리기에 이른다. 흑인 ‘에리얼’을 원했지만, 그 변화에 따른 서사적 작업에는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다의 흑인 공주 ‘에리얼’은 백인 왕자 ‘에릭’을 만난 뒤 육지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는다. 둘 사이의 결혼은 다원주의를 내세워 언뜻 인종 간 화해를 표현하려는 듯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진정한 화해라고 볼 수 없다. 현실 속에 존재하던 위계와 힘의 불평등을 간데없이 감춰버린 다음 그걸 해피 엔딩으로 포장한 반쪽짜리 결말이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공주’라는 존재에 그저 드레스를 입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소녀를 넘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라는 의미를 덮어씌웠다. 아이들에게 공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심어주기 위해 애써왔다면, 이제는 흑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누구든 공주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전해 줄 시대가 왔다. 하지만 시대가 내어 준 과제가 백인이 흑인에 가한 인종차별 문제를 서로에 대한 소통과 이해 부재였던 것으로 간단하게 봉합하라는 요구는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다원주의가 실현된 유토피아적인 세상은 19세기 카리브해와 함께 갈 수 없다. 동심을 지키기 위해 흑인들을 향한 역사적인 핍박과 구조적인 폭력을 다루고 싶지 않았다면 디즈니는 먼 옛날 <인어공주> 말고 다른 소설을 영화화했어야 한다.

할리 베일리가 연기하는 ‘에리얼’은 너무나 반갑고,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지닌 사회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이번 캐스팅은 사실 논란이 아니라 혁신이다. 하지만 ‘예술 작품 다시 쓰기’에는 혁신적인 캐스팅보다도 어려운 문제들이 산재한다. 있던 작품을 다시 쓰려면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일부는 바꿔야 마땅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의 PC 논쟁도 해결키 어려운데 예술이라는 통 속에 뒤섞이고 난 문제를 놓고 칼로 도려내듯 정확하게 고치는 것이 쉽겠는가? 혹은 대충 해서 그 어려운 문제를 다룰 수나 있겠는가? 정말 PC에 진심이었다면 디즈니는 판타지를 핑계로 대기 전에 훨씬 더 많은 고민의 흔적을 남겼어야 했다. <인어공주>로 보여 준 디즈니의 ‘너무 쉬운 변주’는 원작에 대한 향수도 시대적 흐름에 대한 반영도 보여주지 못한 아쉬운 결과물만을 남긴 채 마치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힘을 잃었다.

 

권예진 기자

yejingwon@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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