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1일을 아시나요

8월 15일은 무슨 날인가? 대부분이 광복절이라고 답할 것이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라고 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이날은 임시정부 수립일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현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날이다. 이에 The HOANS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과정 ▲의의 ▲한계를 정리해 봤다. 또한 건국절 제정 논쟁을 알아보고, 최근 논란이 된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대한 찬반 여론을 살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 발자취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19년 3.1 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3.1 운동은 비록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지만, 전례 없는 전국적·대규모 운동으로서 우리 민족의 힘으로 나라를 수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해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발판이 됐다.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상하이 ▲광저우 ▲충칭 등을 넘나들며 일제의 눈을 피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광복을 맞이하자 국내에서 정식으로 활동하기 위해 귀환했다. 그러나 일본이 떠나간 한반도는 또다시 미국과 소련의 이권 다툼에 휘말려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은 이념적으로 통합된 정부를 구성하고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후 1948년 UN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결정하자 이에 반대한 김구가 방북했으나 또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해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8월 15일 이승만이 취임했다.

혹자는 일제의 패망으로 어부지리로 얻어낸 광복이라며 광복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의의를 폄하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권피탈 이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리고 광복에 이르는 역사가 독립을 외치며 스스로 몸을 내던진 수많은 아무개의 피로 쓰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빛과 그림자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을 보면 ‘기미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임시정부의 연속성을 명문화한 것이다. 당시 초대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은 국회 개원식 연설에서 정부가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민국 연호를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 또한 “우리 대한 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현재 자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1919년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다고 규정했다.

더불어 1941년 제정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건국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여 ▲개인 간 ▲민족 간 ▲국가 간 평등을 주창한 바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임시정부에서 탄생했다. 이처럼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민주주의의 온전한 시작을 국내외에 선포했다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한계도 존재한다. 해방 후 좌·우파 노선 정리 실패 및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은 남북 분단 및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을 낳았다. 이 과정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이들을 무력 진압한 제주 4·3 사건과 좌익 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관련자를 집단 학살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 수많은 민간인이 이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건국론 논쟁, 멈춰!

 

매년 8월 15일만 되면 대한민국 건국일이 언제인지를 두고 1919년 건국론과 1948년 건국론 간에 설전이 벌어진다. 이는 2006년에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가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는 글을 투고하며 시작됐다.

그는 1945년 광복이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근대국가 건립을 위한 준비가 전무했기에 ‘별로 신명 나지 않는다’며 ‘진정한 의미의 빛은 1948년 건국 그날에 찾아왔다’고 적었다. 또한 1948년 헌법 제정으로 역사상 처음 국민 주권이 선포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교수뿐 아니라 1948년 건국론 측은 당시 임시정부가 몬테비데오 협약 제1조가 규정하는 국가의 조건인 ▲국민 ▲영토 ▲정부 ▲주권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한편 1919년 건국론 측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주권 ▲영토와 ▲민주공화제 ▲대통령제 ▲삼권분립 체제를 명시했다는 점을 내세운다. 또한 3·1독립선언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한 후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했다는 점을 제시한다. 또 이승만 정부에서 여러 차례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밝힌 점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이 두 주장 모두 1919년 임시정부에서 건국절을 정한 바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1920년 임시정부는 10월 3일 개천절을 ‘건국기원절’로 명명하고 국경일로 공식 제정했다. 건국 기점을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운 날로 둠으로써 대한민국이 반만년 역사의 오랜 전통을 지닌 국가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개천절은 현재까지 국경일로서 기념되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모든 나라에 있는 건국절이 없는 나라’라는 이 교수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승만의 두 얼굴, 그를 기념해도 될까

 

지난 6월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출범하며 이승만 기념관 건립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윤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한편 야당이 거세게 반발하는 상황이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 찬성 측은 이 전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서 광복 직후 혼란한 시기를 잘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을 들고 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지난 7월 “어떤 개인에 대한 숭배나 찬양을 위함이 아니”라며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반대 측에서는 1948년 건국론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종찬 광복회장(이하 이 회장)은 지난달 3일 이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 시조’ 내지는 ‘건국 대통령’으로 신격화하지 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반대 측은 ▲제주 4.3사건 등 민간인 학살 ▲발췌개헌·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 선거 등을 지적하며 대한민국 헌법이 “우리 대한국민은 (…)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한편 이 회장은 지난달 10일 공과를 그대로 만드는 기념관이라면 찬동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여론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여론조사공정(주)에서 지난 7월 전국 유권자 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2%에 달했다. 앞으로 부정적인 여론을 어떻게 해소할지가 관건으로 보인다.

 

역사 앞에 서서

 

건국론 논쟁은 해를 더할수록 이념 갈등을 격화하며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서 정한 건국기원절을 현재까지 개천절로 기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당 논쟁은 무의미하다. 1919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건국기원절을 10월 3일로 정했다는 것,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한편 이승만 기념관 건립과 관련해서는 이 전 대통령의 과오를 모두 다루어야 국민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건국이 언제인지, 이 전 대통령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논쟁을 벌이고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건 우리가 누리는 안락한 일상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치열하게 싸워 얻어낸 값진 승리의 결과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해묵은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이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게 후손으로서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역사 앞에 서서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일 것이다.

 

조유솔·유성규·임재원 기자

2022150012@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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