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개도국 특혜, 더욱 중요해지는 정부 행보

최근 국제사회에서는 WTO 개발도상국(이하 개도국) 특혜대상 국가의 범위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5년 WTO 출범시 개도국 특혜를 인정받았지만,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 특혜를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에 직면해 있었다. 개도국 특혜 포기 배경과 그 영향에 대해서 The HOANS가 훑어봤다.

지난달 25일 정부는 제208차 대외경제장관회의 결과를 발표하며 ‘미래 WTO 협상에서 농업과 기후 분야의 개도국 특혜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개도국은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 개발이 선진국보다 뒤쳐진 나라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1995년에 개도국 특혜를 인정받았으나,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계기로 농업과 기후변화 분야에서만 특혜를 유지하기로 한 바 있다. 단, 정부는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즉 우리나라가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더라도 추가로 WTO에서 새로운 협상이 진행되기 전까진 기존 특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그 배경은?

정부의 이번 발표는 미국 등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개도국 특혜에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한 대응이다. 지난 7월 2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경제적 발전도가 높은 국가가 WTO 내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WTO가 90일 내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 차원에서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요건은 ▲OECD 가입국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세계은행 고소득 국가(1인당 GNI 1만2056달러 이상) ▲세계 상품교역의 0.5% 이상의 4가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4가지 요건 중 한 가지라도 해당하는 국가는 개도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개도국 지위의 국가 중 앞서 언급된 4가지 기준에 모두 해당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우리나라가 개도국으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보고 앞으로 WTO 관련 협상에서 농업과 기후변화 부문에 한해서도 개도국 특혜를 주장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한국은 농업 부문에서의 개도국 혜택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그럼에도 정부가 개도국 특혜를 포기한 배경에는 개도국 지위 포기가 자동차 관세 협상, 방위비 협상 등 미국과의 외교·경제 협력에 있어서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단 자동차 관세 협상에서 이번 결정으로 인해 한국이 미국의 자동차 무역확장법 제232조 적용 제외를 좀 더 강하게 피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되고 있다. 무역확장법 제232조는 “미국 대통령은 외국산 제품이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될 때 긴급히 수입을 제한하거나 고율 관세를 매길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고 규정한다. 이를 근거로 미국 상무부는 외국산 자동차와 부품의 관세 부과를 결정할 예정이었는데, 우리나라가 개도국 특혜를 포기함으로써 협상을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을 전망이다.
일각에선 미국이 WTO 개도국에 압력을 가한 이유는 중국과 인도를 겨냥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잇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기술 특허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불만이다. 또한 인도는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내수 시장을 구축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을 통해 크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압박에 싱가포르와 브라질은 지난 9월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지만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중국의 글로벌타임스는 “중국에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은 서방 패권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라며 미국의 압력을 비판했다. 또한 중국 상무부 연구원 국제시장연구소 바이밍 부소장은 “중국은 여전히 개도국이기 때문에 한국의 결정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며 개도국 지위 유지 의사를 비쳤다.

국내의 혼란, 위협 최전선에 선 농업

현재 우리나라 역시 경제적 위상으로 봤을 때 ▲GDP 규모 세계 12위 ▲수출 세계 6위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하는 등 개도국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개도국 특혜를 그대로 포기한다면 국내외적으로 여러 혼란을 피할 수 없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농업 측면에서 보면 농산물 시장이나 농업종사자에게 지원되는 각종 보조금에 규제가 생기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농업보조총액(AMS)을 연간 1조 4,900억 원까지 쓸 수 있었지만, 특혜를 포기한다면 보조금 지급 한도의 대폭 감액을 피할 수 없다. 수입농산물에 대한 관세장벽도 허물어져 쌀, 고추, 마늘, 인삼 등 16개 핵심농산물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된다. 현재 쌀 기준 513%의 고율 관세로 농산물이 보호되고 있으나 개도국 특혜 상실 시 154% 수준으로 떨어진다. 값싼 외국산 농산물이 국내 시장에 유입돼 농업종사자들의 피해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우세하다.
농업인들은 정부의 결정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강원도 농업인단체총연합회는 “문재인 정부가 이해 당사자인 농민들과 대화 없이 일방적으로 개도국 지위를 내려놨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들은 “정부는 지금이라도 전국의 농민단체와 대화를 통해 농촌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라며 “이를 토대로 개도국 지위 포기를 철회하고, 새로운 농업정책을 수립하라”고 주장했다. ‘WTO 개도국 지위 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은 “개도국 특혜는 피폐해진 농가경제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치였다”며 “농업과 농민의 생존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정부처사”라고 규탄했다. 농민신문 또한 ‘개도국 지위포기, 언제까지 농업 희생양 삼을 건가’ 등의 사설을 게재하며 정부의 이번 결정과 대책을 비판했다. 국회 농림축산해양수산위원회 역시 “정부 발표는 매우 잘못된 판단”이라며 “이제라도 정부가 초심으로 돌아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 줄 것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농업인들의 반발과 정부의 대처

농업인들의 이러한 반발에 정부는 쌀 등 민감품목에 대한 별도 협상 권한은 유지되기 때문에 당장은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낙연 총리는 “정부도 농업인들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농산물 관세와 보조금에 미치는 당장의 영향은 없다”고 반응했다. 아울러 정부는 DDA 농업협상이 장기간 중단된 현 상황에서 이 협상이 타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향후 특혜 없는 협상으로 인한 영향에 대해서도 대비할 시간과 여력은 충분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선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정부는 미래의 WTO 농업협상에서 ▲국내농업 민감분야 보호 ▲국내농업에 영향에 발생할 경우 피해 보전 ▲국내농업의 근본적 경쟁력 향상을 위한 대책 마련의 3가지 목표를 우선시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정부는 미래에 WTO 협상 시 우리 농업의 민감분야는 최대한 보호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협상할 권리를 보유하고 행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우선 정부는 보조금 허용과 관련된 문제에선 WTO에서 규제하는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는 공익형 직불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공익형 직불제는 쌀 중심의 현재 직불제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품목의 균형을 유도해 농가 소득의 안정을 유도하는 제도다. 정부는 공익형 직불제 예산을 올해 1조 4천억 원에서 2조 2천억 원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기존 직불금의 81%를 쌀 농가에 지급하는 형태에서 모든 작물에 동일하게 지원하는 형태로 바꾸는 것을 계획했다. 또한 소규모 농가에 경영 규모와 관계없이 일정금액을 지급하고 경영 규모가 작을수록 면적당 지급액을 우대하는 중소농 배려 단가체계를 갖출 것이라고도 밝혔다. 정부는 공익형 직불제와 함께 로컬푸드 소비기반 마련을 위한 농식품 안전성 검사와 공공 급식 연계체계 구축 등에 대한 지원 강화의 의사도 드러냈다. 청년농 육성 지원 계획도 언급됐다. 하지만 기존에 농업인들이 요구하던 전체국가예산 4% 이상의 농업예산 책정 등의 보다 진실성 있는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더욱 현명한 결정을 위해선

이번 정부의 개도국 혜택 포기에 대해 양준석 가톨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SBS CNBC의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미국의 의도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국이 갈등의 중심에 서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어서 양 교수는 “비록 기존 혜택의 변동이 없고 추후 협상 가능성이 남아있더라도 국내농업이 타격을 입을 확률이 높은 만큼 농민들에 대한 설득과 포용의 과정을 갖는 것이 정부의 숙제”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WTO 개도국 문제에 관해 정부가 국내사회와 국제사회 양쪽에서 어떤 자세와 행보를 보일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외적으로 두 개의 계산기를 놓고 정부가 어떤 답을 낼지 관심이 주목된다.

 

이풍환·오성원·오은서·황제동 기자
98tigger@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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